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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테크리스타
앙테크리스타
  • 최승우
  • 승인 2024.02.20 11: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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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브 지음 | 문학세계사 | 184쪽

서서히 숨통을 죄어오는 섬뜩하고 잔인한 적과의 결투
악에 지배당하고 있는 두 소녀를 매혹적으로 탐색하는 소설

『앙테크리스타』는 아멜리 노통브의 신화적 세계를 이루는 고유한 요소를 모두 담고 있다. 독기 서린 아름다움과 추함부터 침입자에 대한 매혹, 문학 혹은 언어 자체에 대한 숭배, 일상 속으로 침입하는 기괴함까지. “악이 세상에 침투한 것은 거짓말을 통해서이지 범죄를 통해서가 아니다.”

이 짧은 소설은 거짓말과 허영, 10대의 신체에 대한 냉소적인 탐구이다. 1992년 첫 소설을 출간한 뒤, 그녀는 자신의 강박관념인 ‘타인’의 관에 못을 박는다. 그 타인을 우리는 적대자 혹은 침입자 또는 사르트르식으로 “지옥”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에는 어김없이 ‘적’이라 부를 만한 타인이 등장한다. 이 적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성가신 침입자나 섬뜩할 정도로 잔인한 가학자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희생자를 모욕하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서 서서히 숨통을 조인다.

이 적은 내부에서 출현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공항 대기실에서 연착된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문득 다가와 말을 걸더니 도무지 놓아주지 않는 성가신 인물이 있다(『적의 화장법』). 그밖에 다른 작품들에서도 이 적의 존재는 빠짐없이 등장한다. 물에 빠진 어린아이를 웃으며 지켜보고만 있는 잔인한 보모든(『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 발레리나의 꿈을 접게 된 양딸에게 혐오감을 드러내며 박해하는 어머니든(『로베르 인명사전』).

“참된 시선에는 선입견이 담기지 않는 법이다. 진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면 펄펄 끓는 원자로를 보았을 것이며,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진 채 화살과 과녁만을 찾고 있는 활을 보았을 것이고, 그 두 가지 보물을 갈구하는 절규를 들었을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적과 희생자, 박해와 고난은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에 끈질기게 등장하는 주제로서, 이번 소설 『앙테크리스타』의 테마 역시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두 인물이 악의에 찬 적과 박해받는 희생자로 대립하고 있다. 크리스타와 블랑슈가 그들이다.

수줍음 많고 얌전한 블랑슈는 못생기지도 예쁘지도 않은 외모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게 자신의 외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과 달리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아름다운 크리스타를 부러워한다.

크리스타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지만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는 악마적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은근슬쩍 블랑슈의 삶에 끼어든다. 블랑슈의 삶에 끼어든 크리스타는 블랑슈의 정체성을 조금씩 침탈하더니 드디어 모든 것을 빼앗는다. 그리하여 크리스타는 마침내 앙테크리스타가 되는데…… 

작가는 고양이와 쥐 놀이를 하는 두 소녀의 관계를 잔인하게 관찰한다. 작가의 시선에는 약간의 사디즘과 퇴폐주의적 사악함의 색채가 묻어있다. 한 마디로 상대를 모욕하고 끈질기게 괴롭히며 서서히 숨통을 죄어가는 섬뜩하고 잔인한 적의 이야기, 라고 할 수 있다. 

아멜리 노통브는 대체 왜 이렇게 ‘적’이라는 존재에 집착하는 걸까? 거의 모든 작품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두 인물의 대립’ 혹은 ‘적과의 대적’이라는 구도는 단순히 ‘선과 악의 대립’으로 보이지 않으며, 적이라는 존재 또한 ‘절대적 악’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 적의 존재와 관련하여 작가는 매우 흥미로운 얘기를 하고 있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녀는 열두 살 때 자기 안에 “창조적임과 동시에 파괴적인 엄청난 적”이 탄생했으며, 그녀에게 글쓰기란 곧 이 “적과의 결투”라고 밝힌 바 있다.

작가의 내면 깊은 곳에서 집요하게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그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 ‘적’의 존재. 그에게는 “이 세상에 없어서 안 될 것”이 바로 이 ‘적’인 것이다.

2019년 공쿠르상 최종 후보, 2021년 르노도상 수상
프랑스 문단의 ‘앙팡 테리블’로 불리는 아멜리 노통브

잔인함과 유머가 탁월하게 어우러진 작품으로 현대 프랑스 문학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벨기에 출신의 작가 아멜리 노통브는 1967년 일본 고베에서 태어났다.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 중국, 미국, 방글라데시, 보르네오, 라오스 등지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스물다섯 살에 발표한 첫 소설 『살인자의 건강법』(1992)이 10만 부 넘게 팔리며 '천재의 탄생'이라는 비평계의 찬사를 받았다. 이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녀의 작품은 세계적으로 1천6백만 부 넘게 팔렸다. 『두려움과 떨림』(1999)이 프랑스 학술원 소설 대상을 받으며 작가로서 확고한 입지에 올랐다.

아멜리 노통브는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매년 거르지 않고 하나씩 작품을 발표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2015년 벨기에 왕국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현재 브뤼셀과 파리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최근 그녀는 『갈증』(2019)으로 공쿠르상 최종 후보에 오르고 『첫 번째 피』(2021)로 르노도상을 수상해 대중성과 더불어 그 문학성을 다시금 인정받고 있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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