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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현실에 맞는 정책인지 살펴보자
우리의 현실에 맞는 정책인지 살펴보자
  • 이강재
  • 승인 2024.02.19 0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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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_ 이강재 논설위원 /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이강재 논설위원

땅에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서라.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 구절이다. 어떤 정책이든 현실에 맞게 시행되어야 함을 말할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최근 논란이 되는 무전공 입학에 대해서도 그렇다.

학생들이 자신의 적성과 흥미에 맞는 전공을 찾아가고 또 미래사회에 필요한 역량을 갖춘 미래 융합형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학과 간의 벽을 허무는 혁신이 필요하다는 추진 배경을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전공이 없이 입학한 후 문과 이과 어느 학과라도 전공할 수 있는 자유전공학부 방식에 대한 적극적 지지자에 속한다. 학생을 볼모로 한 지나친 학과 이기주의에도 반대한다. 다만 이것이 ‘지금’ ‘우리’ ‘모든 대학’에 맞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우려가 있다.

자유전공학부와 유사한 미국의 리버럴 아츠 컬리지나 아이비리그 대학의 교양 교육은 우리나라의 대학 상황과 차이가 있다. 교육의 지향점이 엘리트교육인가 보편교육인가, 대학 재정 상황 및 학생 1인당 투여하는 교육비의 차이, 경영대학처럼 취업 목적의 단과대학이 학부에 있는지 등이 그것이다.

양자 사이의 차이는 교육 여건을 좌우하는 교수 대 학생 비율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미국의 아이비리그 대학의 교수 대 학생 비율은 매우 낮다. 프린스턴대학이 1:5이고, 하버드대학, 컬럼비아대학, 예일대학, 브라운대학이 1:6이며, 가장 높다는 코넬대학이 1:10 정도이다. 학부 중심 대학인 리버럴 아츠 컬리지 역시 교수 대 학생 비율이 매우 낮다. 미국의 윌리엄스 컬리지나 앰허스트 컬리지는 1:7이고, 여타 대학도 1:8~1:10 정도이다.

해외의 경우 2019년 기준 대학 교원 1인당 학생수는 미국 14명, 영국 11명, 독일 12명이다. 우리나라는 기준 자체로도 OECD 국가 평균 교원 1인당 학생 수 15명에 비해 현저하게 많다. 「대학설립운영규정」에 의할 때, 교수 1인당 학생 정원의 기준은 인문사회 계열 25명, 자연과학·공학·예체능 계열 20명, 의학 계열 8명이다. 그러나 현실은 더욱 심각하다.

대학 알리미 사이트에 따르면, 국내에서 가장 형편이 좋다는 서울대의 경우, 2023년 재학생 기준으로 교수 1인당 학생이 15.45명이다. 서울 소재 사립대인 연세대가 21.36명이고, 고려대 22.76명 성균관대 20.82명이다. 지역거점국립대학인 부산대가 21.26명, 경북대 21.53명, 전남대 20.47명, 충남대 23.77명이다. 그나마 국내에서 형편이 좋다는 대학이 이 정도이니 여타 지역의 사립 대학은 어떤 상황일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대학의 교육 여건이 안 좋고 대학별 격차가 크다면, 어떤 고등교육 정책을 구상할 때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아져야 한다. 전국의 모든 대학에 동일한 요구를 하는 것은 당연히 지양해야 한다. 재정지원을 매개로 한 정책은 정부 당국으로서는 불가피한 면이 있겠지만, 대학이 재정적 지원을 위해 자신이 처한 현실을 외면한 채 그대로 수용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과거 광역화 모집을 하면서 전공의 극심한 쏠림현상을 경험했다. 전공 쏠림은 교육 부실화로 이어지며 장기적으로 일부 학문은 존폐 위기에 처한다. 학생은 실험 대상이 아니다. 지금처럼 준비도 거의 없이 급하게 추진하면 안 된다. 충분한 준비와 여건 조성이 필수적이다. 우리가 넘어진 땅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강재 논설위원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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