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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70] 웬델 배리 “자유롭게 살기 위해 책임 있게 먹어야 한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70] 웬델 배리 “자유롭게 살기 위해 책임 있게 먹어야 한다”
  • 박홍규
  • 승인 2024.01.29 08: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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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웬델 배리①
미국의 시인이자 농부, 문명비평가 '웬델 배리'(1934~ ). 사진=웬델 배리 홈페이지

새벽노을을 바라보며 개와 닭들에게 모이를 주고 닭장 문을 열어 풀밭으로 닭들을 풀어주거나 개와 산책하는 일은 언제나 감동이다. 어떤 글이나 그림이나 영화보다 훨씬 더 감동이다. 자연을 바라보고 생명을 돌본다는 것만큼 아름답고 위대한 사랑은 없다. 그밖에 다른 일은 다 부질없다. 그런 감동으로 농사를 사랑하지 못한 젊은 시절을 후회한다.

아귀다툼 같았던 그 시절이 너무 싫어 시골에 숨어사는 데도 아직까지 욕하고 손가락질하는 패거리들이 있어 슬프지만 밤이 지나고 붉디붉은 새벽노을을 보면 다시 감동뿐이다. 

내 발을 쪼아대는 닭들을 내려다보며 내 친구 웬델 배리의 책을 다시 읽는다. 1934년생이니 거의 20년 연상인 그를 감히 친구라고 부르는 것은, 먹거리에 관심이 있으면서 먹거리 생산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하면서 먹거리는 스스로 키우고 거두어 먹어야 한다고 그가 쓴 것을 읽고 평생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농사를 짓겠다고 결심한 탓이다. 그 뒤 시골생활이나 농사에 회의가 들 때마다 그의 책을 다시 찾아 읽기 때문이다. 

농사를 지으며 시와 소설, 수필을 쓰다

배리는 미국의 시골인 켄터키 중에서도 시골에서 5대 이상 농부였던 부모의 집안에서 태어나 켄터키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몇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지만 1965년부터 약 15만 평의 땅을 사서 옥수수와 야채 그리고 양을 키우기 시작했는데 뒤에 그곳은 10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배리는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수많은 시와 소설, 수필을 썼다. 그의 글은 모두, 자신의 작업은 자신이 사는 곳에 뿌리를 두고 그곳에 대한 반응으로 나온다는 신념에 근거한 탓으로 자신이 사는 시골의 모습과 그곳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기에 감동이다.

그의 글은 그의 삶이다. 책상 위에서 컴퓨터로 찍어낸 글이 아니라 농토 위에서 농군의 흙 묻은 손으로 땅을 갈 듯 쓴 글이다. 대단한 권위라도 있는 듯이 보이는 남의 나라 책이나 보고 옮긴 남의 글이 아니라, 자신의 땀방울과 숨길로 한 마디 한 마디를 엮은 글이어서 농사란 흙에 대한 헌신과 상상력에 의존하는 실용예술이라고 하는 그의 믿음을 확신시켜준다.  

그가 30대 초부터 살아온 산골짜기 고향, 미국의 마지막 시골 같은 동네 주민은 100명이 조금 넘어 우리 동네와 비슷하지만 미국의 시골이 다 그렇듯이 그 동네 넓이는 우리네의 작은 군 정도이고 이웃집이 눈에 가물거릴 정도이니 우리와 비교하기 어렵다.

그래도 그곳 사람들은 물론 서로에 대해 잘 알고 각자의 집에서 키우는 말과 노새와 젖소와 개들까지도 다 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숟가락 밥그릇 숫자까지 다 아는 셈이다. 그곳에는 상점이 하나뿐이지만 교회는 둘이다. 배리는 침례교회에 다니지만 기독교가 환경과 평화의 파괴에 도전하지 않는 점을 줄곧 비판해왔다. 

“동네의 하천이 어디에서 흘러오고 
쓰레기는 어디로 가는지 답할 수 있어야”

동네사람들 중에는 오랫동안 정착한 사람들이 아니라 뜨내기들이 많아 문제인 점은 우리와 비슷하지만, 우리네 뜨내기는 대부분 농사를 짓지 않는 도시생활족인 점에서 역시 다르다.

배리는 우리가 책임감을 가지고 살려고 하면 동네의 하천이 어디에서 흘러오고 쓰레기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금세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우리 시골에는 그런 사람들이 거의 없다.

대대로 살아온 노인들도 잘 모른다. 도시인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배리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모두 자기가 사는 땅에 대한 책임감이 없다. 땅값을 최대한 올리려는 점에서 책임을 진다고 할 수 있을까? 그밖에는 땅에 대한 관심이 없다.

사실 땅 위에 세운 집도 거의 없다. 도시는 물론 시골까지 점령한 아파트는 땅의 집이 아니다. 땅 위에서 걷는 사람도 거의 없다. 차로 움직일 뿐이다. 몇 걸음 걸어도 아스팔트나 시멘트 위에서다.   

직접 키워 만들어 먹고, 타자기로 낮에만 글을 쓴다 

배리는 자신을 소농이라고 하며 소농을 옹호하는 책을 쓰지만 그가 말하는 소농은 15만평 농장을 가진 자신처럼 우리의 소농과는 규모가 다르다. 한국에서 소농이란 그 100분의 1미만의 땅을 경작하는 농가로 전체 농가의 3분의 1 정도다.

반면 미국에서 소농이란 연간수입이 25만 달러 이하인 가족농을 말하는데 이는 우리 돈으로 3억 원 정도이고, 월수로는 2,500만 원 정도다. 수입으로 따져도 한국의 소농과는 큰 차이가 있다. 배리가 소농을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한 것은 그런 미국의 소농 전통에 근거한 것이다. 게다가 미국의 식량자급률은 100%를 훨씬 넘는 반면 우리는 50%도 안 된다. 

배리가 가족의 먹거리를 모두 직접 생산하고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점도 우리와 다르다면 다르다. 곡물과 채소는 물론 돼지와 닭, 소와 양을 키워 먹거리를 완전히 자급자족하는 점에서 우리와 다르다. 나무로 만든 그의 집은 그가 숲에서 주워온 나무들로 난방을 하는 점도 다르다.

집에는 전기가 들어오지만 전력을 이용한 난방시설은 없다. 컴퓨터는 없고 CD플레이어만 있다. 전력산업에 대항해 60년이나 된 타자기를 사용해 낮에만 글을 쓴다. 그의 생활은 우리네 시골생활과 많이 다르다.

그러나 그는 글만 쓰는 글쟁이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1960년대 말부터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대를 비롯하여 원자력발전소나 화력발전소 건설에 반대하는 비폭력 불복종운동, 정부의 농정이나 사형제도 등에 대한 비판 활동을 줄기차게 해왔지만 어떤 조직에도 관여하지는 않았다. 

모든 형태의 폭력·파괴에 반대…“미국의 생활 방식은 포력의 타래”

몇 가지 중요한 행적을 살펴보자. 1968년에는 베트남전쟁을 비롯한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1977년에는 소규모 가족농장과 농촌공동체를 옹호했으며, 1879년에는 원전 건설에 반대하는 비폭력운동을 벌였다.

2003년에는 9.11 이후 부시 행정부의 국제 전략을 비판하고, 2009년에는 토양 손실 및 황폐화, 유독성 오염, 화석 연료 의존도 및 농촌 공동체 파괴 문제를 솔직하게 다루는 50년 농업 법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사형제도에 반대했으며 석탄화력 발전소 개소에 반대하는 등 환경운동을 계속했다. 

그의 글이나 행동은 그가 좋은 삶이라고 하는 것의 찬양과 그것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 그에게 단순하고 좋은 삶이란 지속 가능한 농업, 적절한 기술, 건강한 농촌 공동체, 장소와의 연결, 좋은 음식의 즐거움, 소규모 축산업, 지역 경제, 삶의 기적, 충실함, 검소함, 존경, 삶의 상호 연결성을 포함한다.

반면, 산업적 농업과 삶의 산업화, 무지, 오만, 탐욕, 타인과 자연 세계에 대한 폭력, 미국의 침식된 표토, 세계화 경제, 환경 파괴는 좋은 삶을 파괴하는 것으로 비판한다. 농민, 평화주의자,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그는 토지, 지역 사회, 인간에 대한 모든 형태의 폭력과 파괴에 반대하는 글을 썼으며 현대 미국의 생활 방식은 폭력의 타래라고 주장한다.

그는 반자본주의적 도덕주의자이자 그가 존경하는 것, 즉 세상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여전히 구원할 수 있는 조용하고 대부분 유명하지 않은 노동과 애정을 찬양하는 작가다. 그는 개인주의를 비판하며, 가족과 결혼을 강조하기도 한다. 

나는 그를 미국의 마지막 농부라고 부른다

미국의 농촌에서도 그처럼 사는 사람들은 흔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그를 미국의 마지막 농부라고 부른다. 그 자신 ‘미친 농부’라고 하고 자신의 삶을 ‘해방 전선’이라고 한다.

그가 해방하려고 하는 것은 도시의 물질, 이익, 소비, 광고, 허위, 무엇보다도 그 모든 것을 낳는 자본과 권력이다. 그래서 그는 도시를 떠나 시골에 산다. 그곳에서 대가 없이 일하고, 가난해지고,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누군가를 사랑하라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 울림이 가장 큰 그의 말은 책임에 대한 것이다. 그는 우리가 책임 있게 먹어야 하는 이유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라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내가 키운 야채를 처음 먹었을 때 비로소 이해했다. 내가 굳은 땅을 파서 씨앗을 심고 잡초를 캐내면서 땀 흘려 키운 야채를 처음 먹었을 때 만끽한 것은 자유였다.

그러나 그 자유마저도 이제는 문제다. 배리의 외침은 미국에서도 외로운 것이지만 이 땅에서는 더욱 외롭다. 사실 미국의 식량주권은 문제가 없고 대량 기계식 생산이나 유전자 조작 농법 등이 문제이지만 그것도 우리와 비교하면 문제가 안 될 정도다.

코로나19 이후 귀농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수도권 인구가 비수도권 인구를 능가했다는 슬픈 소식만 들린다. 게다가 정치적 책략 등의 이유로 수도권은 더욱 비대화하는 반면 비수도권은 더욱 쪼그려들고 있다. 보수적이고 이기적인 풍토에서 그런 현실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귀농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난망이 아닐 수 없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했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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