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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69]  “아나키스트들과 달리 나는 국가가 폐지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69]  “아나키스트들과 달리 나는 국가가 폐지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 박홍규
  • 승인 2024.01.22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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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제임스 스콧 2
제임스 스콧

1976년 예일대로 옮긴 스콧은 아내와 함께 코네티컷주 더럼에 있는 농장에 정착했다. 그들은 1826년에 지은 소박한 농가에서 살면서 작은 농장에서 시작하여 1980년대 초 근처에 더 큰 농장을 구입하고 양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후 스콧은 『농민의 도덕경제』에서 전개한 자신의 이론을 세계 다른 지역의 농민들에게까지 확장시켜 농민을 비롯한 무력한 사람들이 중앙집중식 국가통제를 위협하기 위해 직접적인 대결보다는 회피와 계략을 사용하는 방법을 모색한 세 번째 저서인 『약자의 무기』(후속 저서인 『지배와 저항의 기술』과 함께)를 썼지만, 저항 연구의 성경이라고 불리는 이 책은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못했다. 

스콧은 중앙집중식 혁명 운동이 거의 그들이 대체하려는 목표보다 더 억압적인 국가가 됐다고 본다. 공산주의 혁명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에서 일부 좌파들이 찬양하는 베트남이나 쿠바도 예외가 아니다. 북한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중국이나 구소련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혁명이 국가가 되면 다시 민중의 적이 된다. 따라서 권력을 얻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다. 

한국에서 ‘반공’ 계열로 오해받은 스콧

1998년에 출판된 『국가처럼 보기』는 소련의 집단농장이나 미국의 산업 영농을 비롯하여 아프리카의 강제 촌락화나 남미나 인도의 신도시 건설과 같은 자유시장주의 국가에 의한 하향식 사회계획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다. 한국에서는 2010년에 이른바 뉴라이트 계열 사회학자에 의해 번역되어 스콧을 같은 ‘반공’ 계열로 오해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타 공인의 좌파이고 아나키스트다. 스콧은 그 앞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화전민이나 이동 경작을 하는 농민이 넓게 퍼져 생활하는 비국가적 공간이 국가적 공간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비판하고, 농업을 공업으로 대체해야 한다거나 농민을 노동자로 대체해야 한다는 경제발전론을 따르지 않는다.

국가개발이 내세우는 사회복지 담론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이 언제나 비국가적 자원이었던 과거의 공동체를 거의 항상 파괴하거나 분열시켰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국가가 지역 고유의 다양한 삶을 표준화하고 단순화하는 파괴에 맞서 국가처럼 보지 말고 우리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중앙집중화되고 상품화된 삶에서 벗어나 자치와 자급의 기반을 다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세와 징병 체계를 위해 도입한 ‘사회적 단순화’ 

국가가 통치대상을 단순화하는 사례의 하나가 길이·부피·무게 따위를 재는 방식을 표준화하고 단순화하는 ‘계량혁명’이다. 이는 자본주의 성장의 기본이 되었고 중앙집권적 근대국가 건설의 초석이 되었다. 계량혁명을 비롯한 사회적 단순화는 조세와 징병 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도입되었고, 이를 통해 국가의 능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처럼 국가는 국민과 그들의 환경을 단순화함으로써 그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통해 그들을 관리했다.

성씨의 창제, 도량형의 표준화, 토지 조사 및 등기제도의 확립, 인구의 등록, 언어와 법률의 표준화, 도시 설계,  교통의 조직화 등의 모든 조치는 바로 이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를 우리는 근대화니 문명화니 하며 높이 평가하고 서양에서 먼저 시작된 그것을 모방하고자 불철주야 노력했으나 사실 그것은 국민 감시를 통한 국가권력의 비대화에 다름 아니었다. 

조미아, 국가에서 도망친 사람들의 땅

스콧이 2009년에 출판한 『지배당하지 않는 기술: 동남아시아 고지대의 아나키스트 역사』는 우리말로 2015년에 『조미아: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로 번역됐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타이, 버마(미얀마), 중국에 걸친 조미아라는 고지대 주민들이 지난 2천년 동안 국민국가의 지배를 피한 기술을 산악지대에 흩어져 사는 것과 화전 경작, 구전문화의 유지 등에서 찾는다.

그곳은 세계 여러 지역 중 아직 국민국가 안으로 편입되어 있지 않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이다. 아니 국가에 편입되려고 하지 않고 국가를 멀리하려고 정치적이며 전략적인 선택을 한 사람들, 즉 국가에서 도망친 사람들의 땅이다. 

그들과 달리 국가에 편입되는 논농사의 획일성은 사회적·문화적 획일성, 특히 가족 구조, 남성 노동 및 남아 선호, 식습관, 건축 양식, 농업 의례, 시장 교환 등의 획일성을 초래한다. 그리고 논농사 국가는 화전민과 수렵채집인들을 노예로 삼아 발전하고, 만리장성 등을 통해 그들을 철저히 봉쇄한다. 

그러나 개활지가 많은 한 화전이 투입 노동 대비 이익의 관점에서 논벼 재배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국제무역에서 귀하게 취급받는 상품을 구하는 수렵채집과 결합될 때 적은 노력으로 큰 이익을 남길 수 있다.

이처럼 상업적 교환의 이점을 누리면서 사회적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화전농업과 수렵채집의 장점이다. 즉 화전농업과 수렵채집은 후진적인 삶의 양식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선택이다. 한반도에도 이런 조미아가 있었을까? 화전민이 많았던 강원도 평창이나 개마고원을 그 유사한 사례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 같다.  

엘리트에 의한 대중 ‘길들이기’에 대한 반항자, 그가 아나키스트다

스콧이 2012년에 발표한 『아나키즘을 위한 두 번의 응원: 자율성, 존엄성, 의미 있는 일과 놀이에 관한 여섯 편의 쉬운 에세이』는 『우리는 모두 아나키스트다』라는 제목으로 2014년에 우리말로 번역됐다. 아나키스트라는 말이 폭탄을 투하하는 과격주의자를 쉽게 연상하게 하는 한국이나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 ‘우리는 모두 아나키스트’라는 자극적인 제목이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졌을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도리어 아나키즘을 자율성과 존엄성으로 보고 그것을 쉽게 쓴 책이라는 원제가 내게는 마음에 든다. 이 책이 나에게 특히 공감된 점은 서문에서 “아나키스트들과 달리 나는 국가가 폐지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힌 점이다.

그에게 아나키스트란 테크노크라트 엘리트의 지배에 대한 일상적인 저항자다. 즉 엘리트에 의한 대중 ‘길들이기’에 대한 반항자다. ‘길들이기’의 일반적 수단이 법이다. 아나키스트는 법의 위배와 방해를 통해 민주적인 정치변화에 항상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그는 주장한다.

스콧은 인간의 자유를 위한 위대한 해방적 성취는 질서 있는 제도적 절차의 결과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무질서하고 예측할 수 없는 자발적인 행동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가 비난한 ‘프티부르주아’를 중시하다

가령 선진국의 택시 운전사는 모든 규정을 맹목적으로 따르기 때문에 교통을 정체시킨다. 그 반대의 사례, 즉 신호등도 없고 차선도 없고 규정도 없는 후진국에서는 운전자들의 경험과 사회적 학습을 바탕으로 정체도 없는 교통이 가능하다.

스콧이 마르크스나 그의 무리들이 비난한 소위 프티부르주아를 중시하는 점도 눈에 띈다. 약간의 토지를 갖고 있는 소규모 농민이나 소규모 사업체를 운영하는 독립생산자나 작업장의 장인들이 시민의 활력을 되살리고 평등과 정의를 위한 대부분의 투쟁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소규모 자작농과 상점 주인이 지배하는 사회는 지금까지 고안된 어떤 경제 시스템보다 생산 수단의 평등과 대중적 소유에 더 가까워진다. 그러나 ‘시장 근본주의’는 ‘사람들을 파멸적인 선택으로 몰아넣는 상황의 강압적인 구조’를 무시하고 ‘부, 재산, 지위의 엄청난 격차가 자유를 조롱’하는 것을 무시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는 자유라는 미명으로 자유를 조롱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앞의 자유는 사실 반공이라는 장막으로 보호되는 소유(시장 근본주의)의 자유일 뿐이다. 

스콧의 아나키즘은 ‘길들이기’에 대한 거부

스콧에 의하면 혁명은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행동하고 사물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자신의 힘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커지는 다양한 규모의 수많은 반란 행위의 산물이다. 아나키즘은 미래의 혁명 이후의 이상 사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날 우리 활동에서 그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다. 

스콧의 아나키즘은 그가 공상적 과학주의라고 부르는 전통적 아나키즘과 달리 국가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오랫동안 주장한 ‘길들이기’에 대한 거부다. 그런 ‘길들이기’가 신원 확인을 위해 아버지 성을 따르게 한 것을 비롯하여 조세, 법원, 토지, 징병, 경찰, 학교, 공장, 표준어, 가족, 심지어 신호등 등등이다. 

‘아나키즘은 인간의 품위를 지키는 상식이다’

최근에는 유전자(DNA)니 폐쇄회로티브이(CCTV)니 하는 감시와 통제 장치로 더욱더 ‘발전’하고 있다. 스콧은 그런 타율성에서 벗어나 자율성과 존엄성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제목을 제대로 바꾸려면 ‘아나키즘은 인간의 품위를 지키는 상식이다’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책의 처음에 나오는 신호등 이야기는 인도의 대도시를 비롯하여 신호등 없이도 교통질서에 큰 문제가 없는 사례를 아나키즘적 삶의 보기로 드는데, 공산주의자인 말름은 그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비웃는다. 마치 과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유토피아 사회주의를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비웃고 자신들의 사회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했듯이 말이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했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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