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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공무원… 북한 체제의 지속, 여성의 역할에서 찾다
공부하는 공무원… 북한 체제의 지속, 여성의 역할에서 찾다
  • 최영진
  • 승인 2024.01.10 08: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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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로 향한 윤미량의 삶과 글』 굿플러스북 | 2023 | 516쪽
『Women in North Korea』  윤미향 지음 | 굿플러스북 | 2023 | 340쪽

“북한 여성에 대한 연구, 
특히 영어권에서 접할 수 있는 
저술은 빈곤하기 그지 없었다. 
북한 여성 연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물이, 
그것도 영문 저술로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북한 여성들은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강인한 존재였다.”

개인적 회고

그녀는 필자의 고향 선배이자 학과 선배였다. 여학생이 드물었던 1980년대 초 말 그대로 ‘홍일점’이었다. 나의 고향을 알게 된 교수님들이 “윤미량을 아느냐?”며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려 했을 때, “누구지?” 하는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까운 선배들에게 그녀에 대해 물었을 때, 공통된 답변은 “교수님들조차 인정하는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라는 것이었다. “흑석동의 한나 아렌트”라는 별명도 갖고 있었다.

게다가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시위를 주도하며, “지금은 싸워야 할 때”라며 사자후를 토했다는 전설적인 소문도 들려왔다. 대학 1학년이 만나기에는 ‘넘사벽’의 존재였다. 얼핏 한두 번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함께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감히 말을 건네며 깊은 대화를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 후 나 역시 학문의 길에 접어들면서 “잘 나가는” 윤미량 선배의 소식을 속속 전해 들었다. 늘 “최초”라는 수식어로 시작하는 그녀의 승진 소식은 후배들의 자랑거리였다. 전공이 달라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역쉬 윤미량이야” 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러다 윤미량 전 국립통일교육원장(이하 ‘원장’)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2018년 작은 공부 모임에서였다. 고향 사람들 중심으로 진행되던 공부 모임에 그녀를 초대하여 북한과 통일 문제에 대한 특강을 듣기로 했던 것이다. 40년 만에 만난 그녀는 앳된 목소리의 문학소녀 그대로였다. 쾌활한 얼굴 표정과 ‘라’ 음의 발성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과 순수함이 인상적이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통일의 꿈’이 되살아나고 전율이 느껴졌다.

윤미량 전 국립통일교육원장이 지난 2014년 6월 18일 통일교육위원 경남협의회 워크숍에서 특강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공부하는 관료의 전형

윤 원장은 공직 생활 가운데서 학업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91년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북한 여성정책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마쳤다. 1997년에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영국 런던정치경제대학교에서 「Women in the Two Nations and Four States」라는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대 초 미국 우드로윌슨센터에 초빙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북한 여성에 관한 영문판 원고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번에 출간된 『Women in North Korea』의 초고다.

그녀는 늘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실력 있는 공무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통일은 도둑처럼 급작스럽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에 보다 진지한 자세로 연구해야 한다고 후배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그녀가 남긴 두 권의 책은 공직자로서 어떤 자세로 공부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통일로 향한 한 인간의 진지함

윤 원장이 남긴 글은 북한 체제에서 통일정책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맡은 업무만큼이나 다양하다. 북한과 같이 종잡을 수 없는 존재를 상대해 야 하는 통일부 관료들에게 북한 체제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가 여러 업무를 담당하면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주제 가운데 하나는 북한 체제의 내구성, 혹은 지속가능성이었다. 남북 교류나 통일정책 역시 북한 체제가 어떤 특성을 갖고 있으며,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통일로 향한 윤미량의 삶과 글』은 내용과 형식에서 유고집의 성격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남겨진 글은 통일을 향한 뚜렷한 지향을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여느 북한 전문가들과는 달리, 북한 여성의 역할에 방점을 찍고 있었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북한 체제의 지속을 설명하는 주요 논지는 북한에도 시장경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배급체제가 붕괴된 이후 그나마 마을마다 시장(장마당)이 개설되고 여기서 필요한 물건들이 거래되고 있다는 것.

그러나 대부분의 논의는 여기서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다. 윤 원장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그녀는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 기간에도 가정(그리고 체제)이 유지될 수 있었던 핵심적인 이유로 북한 여성들의 역할에 주목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윤 원장이 여성이기에 가질 수 있는 장점인 동시에 북한 체제의 본질을 더 깊게 성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Women in North Korea 

북한은 여느 사회주의국가와 마찬가지로 여성 해방을 달성했다고 외쳤다. 그러나 북한의 현실은 정반대라고 윤 원장은 주장했다. 김일성 부자의 세습이 계속되면서 가부장적 체제는 더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 여성들은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강인한 존재였다는 것이 그녀의 영문 저서 『Women in North Korea』의 핵심 주장이다.

가장 극적인 순간이 1990년대 초반 대기근 때였다. 많은 여성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곡식을 가꾸고 장터에 물건을 만들어 팔며 생계를 책임졌다. 억압적인 가부장제 사회가 늘 그렇듯 위기가 닥치면 남성들은 무능했다.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가족의 삶을 책임져야 했던 이는 바로 여성들이었다. 바로 북한의 여성들이 가족을 건사하고 체제를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북한 체제의 지속성을 설명하 는 그 어떤 이론보다 실질적이고 근본적이다. 그럼에도 북한 여성에 대한 연구, 특히 영어권에서 접할 수 있는 저술은 빈곤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북한 여성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물이, 그것도 영문 저술로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 윤미량은 일찍 떠났지만, 그녀가 남긴 저술은 북한 연구의 찬란한 별이 되어 남을 것이라 믿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통일이 된 고 윤미량(1959~2022)의 삶

윤미량 전 국립통일교육원 원장(사진)은 마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 정치외교학과에 4년 전액 장학금이 지급되는 선호장학생으로 입학했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민주화 시위에 적극 가담, 노량진 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했지만, 여러 교수님들의 도움으로 학업에 복귀할 수 있었다.

1986년 11월 제30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윤미량은 1987년 5월 공직생활을 시작하여, 통일부 여성 최초 사무관·과장·고위공무원, 최초의 여성 하나원장, 여성 최초의 국립통일교육원장 등의 기록을 세우면서 2015년 2월 퇴직시까지 통일부에서만 일했다. 27년 9개월 통일부 근무 내내 한반도 통일 준비 업무와 결혼한 듯, 그가 자주 쓰던 표현대로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자세로 일에 몰두했다. 스스로를 “통일의 딸”이라 지칭하며 평생 미혼으로 지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이산가족과장으로 남북적십자 실무회담에 참가한 이래, 통일부가 담당한 각종 남북한 실무 대표로 활약했다. 탈북민의 숫자가 1년에 3천 명 선을 육박하던 2009년부터 탈북민의 정착을 돕는 하나원장에 부임하여 3년 1개월간 복무하면서 최장수 원장의 기록을 남겼다. 마지막 공직이었던 국립통일교육원장 때는 학생 등 각계 각층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통일교육을 펼쳤다. 

여성으로서 ‘유리천장’을 깨고 통일부에서 “여성 첫” 직책을 가장 많이 맡았으며, 남북회담본부 상근대표였던 2013년 5월 무렵에는 당시 중앙부처내 유일한 여성 가급 고위공무원이었다. 
업무에서는 “까칠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엄격했지만, 부하 직원들도 잘 챙겨 통일부 후배들이 꼽은 ‘본받고 싶은 간부’였다. 통일부 공무원노조 구성원이 투표로 선정한 ‘베스트 과장패’와 2년 연속 ‘베스트 국장패’를 받기도 했다.

2015년 오랜 공직 생활을 끝내고 숙명여대 대학원에서 영문학 박사과정을 밟으며, 어린 시절 간직한 문학소녀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22년 6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 하늘의 별이 되었다.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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