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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 공화국’ 좇는 이념과 현실의 괴리
‘학자 공화국’ 좇는 이념과 현실의 괴리
  • 김재춘
  • 승인 2023.12.29 1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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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최후의 대학』 김재춘 지음 | 학이시습 | 306쪽

현실을 반영하는 대학의 이념은 복수적
연구 중심 대학은 자본의 토대 위에서 작동

대학이 위기에 처할 때 우리는 ‘대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ICT 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미증유의 인구 절벽은 대학의 최후를 예고하는 듯하다. 대학이란 무엇인가? 대학은 학자를 위한 상아탑인가, 아니면 대중을 위한 ‘서비스 공간’인가? 

대학의 이념 또는 이데아에 관한 고민은 대학의 위기와 혼란을 목격하는 현시점에서 더욱 중요해진다. 이념을 명료히 해야 대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대로 설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은 대학의 이념에 대해 도발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대학의 이념은 과연 하나뿐인가? 대학의 이데아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면 동시대에도 복수로 존재할 수는 없는가? 저자는 탈플라톤적 비행을 감행해 대학의 이념·이데아가 복수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 입국하자고 제안한다.

이 책은 지난 900년 대학의 역사를 훑던 저자가 발견한 대학을 움직였던 힘의 역동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당대 지배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순응하거나 저항 또는 타협하며 다음 시대를 열기도 했던 대학 변모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지식인들의 학문·교육 공동체로 시작했던 중세 대학 △새로 등장한 여러 다른 교육기관과 대립하면서까지 전통 고수를 고집했던 근세 대학 △국가 교육 체제의 등장으로 국가별 상황에 맞게 적응해갔던 근대 대학 △경쟁 교육과 평등 교육을 넘나들면서 가능한 한 몸집을 키워가는 기업형 현대 대학 등 여러 유형의 대학의 등장과 성장·쇠락을 이 책은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대학이 다중적 힘의 역동 또는 길항 관계 속에 존재해 왔음을 드러낸다.

많은 사람이 학문공동체로서 중세 대학이나 연구공동체로서 근대 대학을 대학의 이념으로 선호하지만 사실 이러한 대학은 찰나로만 존재했다. 학문공동체로서 출범한 중세 대학은 제도화되면서 전혀 다른 성격의 대학으로 변질됐다. 자유로운 연구공동체였던 근대 대학의 원형 베를린대학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베를린대학을 설립하면서 대학의 자유를 강조했던 훔볼트는 이상과 현실의 리에 실망해 대학설립 2년 만에 사직했다. 게다가 베를린대학이 설립된 지 10년도 안 된 1819년에 독일 제후국들의 카를스바트 결의로 대학에 대한 국가 통제가 독재 정권의 통제에 비견할 정도로 강화됐다. 캘리포니아대학체제를 만들었던 클라크 커(Clark Kerr) 총장은 순수한 학문이나 연구공동체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하늘에 있는 파이에 대한 환상(vision of pie-in-the-sky)’을 지닌 ‘학자 공화국’에 속한 사람이라고 일갈했다. 

이 책은 QS 등 세계 대학 평가, ‘글로컬대학30’을 포함한 대학 구조조정, ‘서울대 10개 만들기’ 등 우리나라 대학 관련 문제에 관한 저자의 진단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저자는 대학의 이념이란 현실의 반영이므로 대학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가령 미국을 포함한 세계 유수 대학, 즉 연구 중심 종합대학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기술한다. “연구 중심 대학의 위상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연구 중심 대학은 실험실, 실험 재료, 관련 장비, 연구 인력 등을 확보하기 위해 막대한 규모의 재정을 필요로 하고, 이런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학이 정·군·산·학·연 복합체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한다. 그리고 대학이 이런 복합체에 참여하려면 정부나 산업체가 요구하는 성과를 단기간에 산출해 낼 수 있는 경쟁력과 수월성을 갖추어야 한다.”(203쪽). 이런 대학을 이념적으로 바람직한 대학으로 볼 수 있을까? 전 세계적으로 많은 학생과 교수들이 연구 중심 대학에 소속되기를 원하면서도 연구 중심 대학이 자본의 토대 위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에 불편해한다. 여기서 우리는 ‘학자 공화국’에 속한 사람들의 이념과 현실의 괴리를 발견한다.

이 책이 대학에 관한 학적 탐구와 현실 경험을 갖춘 사람의 저작이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대학을 연구하는 교육학자이자 대학 행정을 경험한 사람이며, 대학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했던 공직 경험자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일반 학자와는 다른 관점에서 대학의 역사를 해석한다. 이 책이 대학의 지형과 경계선을 새롭게 탐색하는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한다.

 

 

 

 

 

김재춘
영남대 교육학과 교수
전 교육부 차관·영남대 교학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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