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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사회 (계간) : 144호 겨울 [2023]
문학과 사회 (계간) : 144호 겨울 [2023]
  • 김재호
  • 승인 2023.12.13 10: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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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사 편집동인 | 문학과지성사 | 436쪽

겨울호를 펴내며

‘살과 피를 가진 자에 의해 말해지는’

올해 초등학생이 된 아이가 입학하자마자 배워 온 것이 학교 폭력에 관한 것이었다. 친구가 싫어하는 행동을 해서 그 친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폭력이라고 배워 왔다. 그 뒤로 아이들 사이에서는 무슨 유행어처럼 ‘그건 폭력이야’라는 말이 흔해진 것을 보게 되었다.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사안이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눈에 띄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혼내고 있는데, 아이가 엄마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불편하다며 “그건 폭력이야”라고 나의 언행을 지적했다. 꽤 그럴듯한 적반하장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거기서 아이를 더 혼내야 할지, 아니면 먼저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주기 위해 훈계를 멈춰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불편하다는 감정은 실은 다양한 상태를 포괄하는 말이다. 불쾌, 두려움, 민망, 초조, 후회, 슬픔, 외로움 등의 여러 감정이 불편한 상태로 환원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대체로 불편하다. 자신의 상태가 조금만 불편해도 그것을 상대의 탓으로 돌리는 아이들의 태도는 아마도 저러한 다양한 감정들을 일상의 관계 안에서 충분히 학습하지는 못한 채로, ‘불편’과 ‘폭력’이라는 말을 먼저 배운 탓이라고도 말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비단 아이들뿐일까. 서로 다른 의견을 확인하는 일조차 꺼려하고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줄 준비가 되어 있는 관계에서의 안락만을 누리고자 하는, 즉 ‘비판이 불가능한’ 이즈음의 세태 속에서 우리는 다채로운 의견과 다양한 감정을 마주하기 이전에 남을 불편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과도한 예의’와 내가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그건 상대의 탓이라는 ‘어긋난 적대’ 사이를 무한히 오가고 있다. 이러한 사정에서라면, 생산적인 대화가 가능할 리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비평이 비판적 사유를 전제로 하며 대화를 통해 지속된다는 것은 여전히 틀림없는 사실이다. 비판이 없는 시대라는 말을 요즘 종종 듣게 되는데, 합리적인 비판보다는 대체로는 상대에 대한 무관심, 어쩌면 과도한 예의, 때로는 선을 넘은 조롱이 동시에 넘쳐나는 시대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비평이 제 역할을 수행하도록 할 수 있을까. ‘대화’를 통해 ‘비평’의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문학과사회』의 최근 기획들은 우리 사회가 점점 잃고 있는 ‘비판적 사유’와 ‘생산적 대화’의 회복에 그 최종 목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비판으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자신의 감정적 불편과 분노가 정당한가, 그리고 그것이 적당한 곳을 조준하고 있는가를 따지는 일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비판이 대화로 이어질 수 있다. 비판은 대화의 상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말을 거는 행위이지 손쉽게 비난하고 돌아서며 자기 우위를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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