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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
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
  • 최승우
  • 승인 2023.12.13 1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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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목 지음 | 소요서가 | 256쪽

형식주의 방법론으로 다시 쓰는 한국근현대미술사

정영목 서울대 명예교수가 미술사가이자 평론가로서 그간 발표해 온 화가 장욱진에 관한 글들을 모아 그림들과 함께 엮었다. 장욱진은 이중섭, 김환기, 박수근, 유영국과 함께 한국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장욱진의 작고 예쁜 그림들은 그가 신화 속 인물이 되어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그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에 대한 일화와 소문이 비범해질수록 장욱진을 오히려 그 틀에 가두는 게 아닐까?

그동안 장욱진에 관한 평론은 그의 기이한 삶과 불교적이고 도가적인 사상을 중심으로 한 작가론에 치우쳤다. 하지만 저자는 “화가는 그림으로 말하고 그림은 형식으로 표현된다”는 견지에서 장욱진을 한국적 모더니스트로 규정하며, 한국근현대미술사 기술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저자는 장욱진이 60여 년 화업을 꿰뚫어 몇 가지 소재를 작은 화폭에 반복적으로 표현했던 사실을 경이의 눈으로 들여다보라고 권유한다. 그리고 장욱진의 그림세계를 무한히 크고, 반복이 아닌 반복으로서 해석해 낸다. 

장욱진은 주관의 조형의식이 모더니스트의 기본자질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적 정체성은 단순히 재료나 소재의 향토성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라, 독특한 조형 형식에 달려 있음을 일찍이 간파했다. 저자는 장욱진의 《카탈로그 레조네》를 작성한 미술사학자의 눈으로, 그가 남긴 단순한 형식에서 결코 단순하지 않은 예술가의 진정성을 읽어낸다. 삶과 작품 전체를 가로지르는 조형적인 맥락의 진정성은 그의 작은 그림 위에 큰 세계를 펼쳐놓는다. 《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은 1백여 점의 그림들과 함께 독자들을 바로 이 세계로 초대한다.
출판사 서평

장욱진의 삶과 그림
장욱진의 작품세계는 흔히 그의 거처를 기준으로 덕소/수안보/용인 시절로 구분되어왔다. 그러나 장소의 변화보다는 오히려 심상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자전적이며 이상적인 성격의 작품들은 삶을 바탕으로 한 주제와 조형적 독자성이 그 근간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저자는 새로운 시기 구분을 제시한다. 장욱진의 작품세계를 ‘자전적 향토세계’, ‘자전적 이상세계’, ‘종합적 이상세계’의 3단계로 구분해서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조형방법과 세계관이라는 형식과 내용상의 변화를 새롭게 포착할 수 있게 된다.
         
작은 그림, 큰 주제
장욱진의 그림은 작다. 그림은 프레임으로 잘라낸 제한된 공간 안에 화가가 만들어 낸 가상의 세계인데, 장욱진의 그림은 이러한 물리적 조건이 최소화되어 있다. 그러나 프레임의 공간은 화가의 상상력에 따라 거대한 우주가 될 수도 있다. 화가가 의도한 공간의 구조와 내용에 따라 이미지들은 시공간을 초월해 확대되고 재생산된다. 따라서 그림은 규모만으로 그 가치의 질적인 평가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장욱진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장욱진의 그림들은 엽서만 한 작은 크기지만, 물리적인 프레임과 스케일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독창적인 방식으로 극대화하는 데 성공했다.

장욱진의 자화상들
장욱진의 작품에는 한정된 소재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나무, 집, 가족, 까치, 해와 달, 산과 아이 등이 대표적이다. 자전적 성격의 작품을 많이 남긴 화가인 만큼 이런 소재들은 그의 심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비록 자신을 닮은 인물이 아니더라도 이들은 화가의 분신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소재들은 동시대인들에게 익숙한, 보편적인 것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화가의 개성은 공동언어와 같은 보편성을 통해 표현된 셈이다. 이처럼 독창성을 추구하는 장욱진은 서구 모더니즘에 뿌리를 두면서도 전통의 질서 위에서 새로움을 추구한다. 그에게는 한국적인 것이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독창적인 것이 한국적이다.  

먹그림
장욱진의 유화작품들은 동양화와 서양화의 구분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점들이 많다. 그의 작품은 우리 화단의 일반적인 장르 개념 바깥에 있다. 장욱진은 오히려 동/서의 강박관념을 없애고, 우리의 전통을 현대에 접목할 수 있는 조형적 가능성을 회화로 구현한 작가에 가깝다. 미술사적 맥락에서 그의 작품은 원시미술이나 민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먹그림과 불도로서 그린 그림들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장욱진의 먹그림은 미완의 습작이나 밑그림 정도가 아니라, 화가 고유의 조형 세계가 이룩한 성과로 우리의 현대미술사에 기록되어야 한다.

불교와 모더니즘 너머
장욱진의 작품 중에서 불교와 직접 관련된 것들은 지극히 적다. 그리고 그는 불교미술의 관점으로 불화를 그리거나 불교적 신념을 주제로 삼은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장욱진의 작품세계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위상은 작지 않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불교와 연이 깊었고, ‘사람의 몸이란 이 세상에서 다 쓰고 가는 것’이란 신념은 불교의 세계관과 분명 닿아있다. 비록 그의 작품들에서 노장사상의 흔적이 엿보이긴 하나, 불교는 화가로서의 장욱진의 태도와 예술 개념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에게서 생략과 압축의 미적 형식은 단순히 모더니즘의 영향에 국한되지 않고, 예술을 도구 삼아 ‘참된 나’를 찾는 과정의 일환이다. 

장욱진의 자리
장욱진은 어떤 의도를 전제한 채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스스로 밝히길, 그리는 행위에 집중하고 반복해서 몸을 움직일 때 문득 그림과 내가 구분되지 않는 일체의 순간이 찾아온다고 했다. 이 지점에서 장욱진의 그림은 미학적 모더니즘의 한계를 벗어난다. 순간의 무의식적인 행위들과 그 순간의 ‘지금들’이 현재진행형으로 모여들어 저절로 그림이 되는 것과 같다. 우리가 그의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몇 가지 형식들은 이러한 시간들의 흔적이다. 자연이 공간의 일이라면 그림은 시간의 일이다. 장욱진의 작은 그림은 단순하게 반복되면서도 일정한 조화를 변주하는 새로운 시간을 따라 우리 앞에 큰 세계를 펼쳐 놓는다. 

책속에서

P. 7~8 이들의 작품은 형식과 내용만을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수 있는 미술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우리의 삶과 역사의 질곡이 함께 담겨 있다. 즉 일종의 자화상과도 같은 우리의 옛 모습이 그들의 작품에 반추되어 있다. 그 모습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시대의 눈으로 다시 들여다보는 것이야말로 미술사가들이 연구해야 할 일차적인 과제일 것이다.

P. 41~42 미술도 사람의 일이라 사람이 그림보다 앞서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사람을 우선 보고 그 후에 작품에 애착을 갖게 되는 것 또한 어찌 보면 자연스런 일이다. 연구자인 나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그의 인품과 삶에서 많은 감명을 얻었고, 그렇기에 그의 작품에 더욱 애정을 느끼고 공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언제까지 장욱진을 그런 일화와 감성 안에 가두어 둘 것인가? 이제 장욱진을 말할 때 그의 일화와 함께 그의 작품들이 차지하는 미술사적 위치와 형식적인 가치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P. 70 장욱진은 원천적으로 그의 성격상 삶과 작품의 진정성을 버릴 수 없는 작가이다. 그러한 진정성이 때에 따라서는 일상에서 극단적인 생활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작품에 나타난 진정성 역시 그러한 생활의 연장선상에서 풀이할 수 있다. 한 예로 그렇게 순수하게 노출되었거나 혹은 관조적인 일상을 지닌 그가 작업에 관한 한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과 이성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의 균형과 절제의 함축적인 상징기제들은 유아적이거나 유희적이기보다는 지극히 어른스럽고 이성적인 통제력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P. 83~85 그림은 규모에 의해 그 가치의 질적인 평가가 이루어질 수 없다. 크기에 관한 물리적인 비례의 비교가 이론적으로 성립되더라도 일단 독립된 프레임은 그것을 운용하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그 자체 내에 무한한 포맷과 이미지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유비쿼터스 세계인 것이다. 장욱진의 작은 그림들이 바로 이렇다. 텅 빈 큰 화면에 점 하나 찍어놓고 억대를 호가하는 작품이나, 장욱진의 엽서만 한 작은 그림이 비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 162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전통적인 조형요소들은 그것의 시각적인 외형을 빌려온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지닌 순수함과 간결함의 원시적 속성을 표현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작품에서 전통적인 소재를 수용할 때 그것을 작가 자신의 독창적인 언어와 그릇에 담지 못한다 면 그 소재의 진정한 문화적 정체성을 획득할 수 없다. 우리가 ‘한국적인 정체성’을 말할 때 그것은 곧 작가 자신의 정체성이며 작가의 독창 성과 직결된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독창적이기 때문에 한국적인 것이지, 한국적이기 때문에 독창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P. 204~205 하지만 1천여 점(먹그림 포함)에 달하는 방대한 작품 중 불교적 그림이 겨우 30여 점에 불과한 것을 볼 때, 그의 작품세계에서 불교와의 관련성은 그리 많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장욱진의 작품세계는 도교의 노장老莊사상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그 작품세계는 노장사상뿐만이 아니라 불교와 전통적인 무속巫俗과 민화, 설화 등의 요소가 자전성을 바탕으로 서로 종합화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럼에도 나의 판단에는 장욱진이 불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보이며, 그것은 작품 자체의 도상이나 주제보다는 작가적인 인식과 태도, 그리고 예술이라는 개념에 관한 부분에서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P. 211 오랫동안 친밀한 소재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어울려 만들어내는 탈속적이고 이상화된 풍경, 가족을 그리워하는 모습, 때로는 신선 같은 모습, 해와 달이 동시에 뜨고 사물의 크기와 위치가 우주의 자연법칙을 거스른 채 표현된 화면들은 일견 동화적이고 향토적으로 보인다.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진 장욱진의 화면들은 한결같이 현세의 ‘나’를 벗어난 상태를 보여준다. 그만큼 자전적이며 이상적이고, 나아가 화면에 구현된 세계는 자연과 합일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가道家사상에 가깝다. 자연에서의 깨우침이나 ‘나’의 내면에서의 깨우침 모두 어떠한 경지의 ‘도道’를 지향한다는 측면에서 서로 다를 바가 없다. 

P. 235~236 요컨대 앞선 질문의 해답은 자연에 있다. 장욱진 작품에서 자연은 인간과 이분법으로 대립하는 자연이 아니다. 인간과 동식물을 가르지 않는 포괄적인 시공간의 세계이다. 작가는 그 세계의 주변 사물들을 애정으로 보듬는다. 생명은 생명의 고귀함으로, 무생물에게도 애정을 담아 정성껏 의미를 부여한다. 각각의 도상들은 마치 생명체로 환생해 지속적인 이 세계를 떠돌고, 우리는 그들을 다시 만난다.

여기서 장욱진의 그림은 미학적 모더니즘의 굴레, 틀(형식), 한계를 벗어난다. ‘위선’을 인간의 가장 큰 죄라 여기는 그는 ‘목적’ 있는 말을 일절 하지 못한다. 그는 인간사를 떠나 자연까지도 인간의 목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자연으로부터 추출되어 화면으로 옮겨진 도상들 역시 그림을 위한 목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다. 장욱진은 무엇을 미리 설정해놓고 그림을 그리지 않기 때문이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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