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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문학작품 연구의 맹점
우리 시대 문학작품 연구의 맹점
  • 박상준
  • 승인 2023.12.18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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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_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현대소설

이상(1910∼1937)의 소설 『날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방 한 칸을 장지로 나눠 빛도 들지 않는 골방에서 머릿속 궁리만 하던 주인공이 집을 나서게 되고 마침내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에 올라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하며 미래에 대한 상승의 이미지를 드러냈다는 소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매력적인 아포리즘으로 시작하고, 주인공이 유아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하며, 주인공과 아내의 관계가 자아의 분열을 상징하는 듯도 해, 단편임에도 작품 해석의 여지가 무궁무진해 보이는, 말 그대로 천재 작가 이상의 문제작 말이다.

이러한 정리는 현재도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데, 사실, 이렇게 정리되는 『날개』는 이상이 1936년 9월 <조광>에 발표한 그 『날개』가 아니다. 원 텍스트를 제대로 살펴보면 사정이 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허두의 아포리즘은 박스 속에 있는 ‘작가의 말’이고, 작품 끝 주인공의 위치는 백화점을 나선 길거리이며,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는 마음속으로 되뇌어본 것이다. 아내에게 남편의 지위를 부정당해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정처 없는 절망의 극한을 보여 주는 것, 이것이 『날개』의 참된 주제 효과이다.

정처 없는 절망의 극한 보여주는 ‘날개’

이것이 무슨 일인가. 실제의 『날개』와는 다른 어처구니없는 해석들이 계속 이어져 온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겨났을까. 일찍이 고 이어령 선생이 그렇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아니 이것이 모든 이유는 못 된다. 그 이후의 연구자들이 아무런 의심도 갖지 않은 채 그러한 해석을 염두에 두고 『날개』텍스트를 설렁설렁(?) 읽어 온 까닭이다. 그러면 다시 질문. 어떻게 이러한 상황이 지속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조광>의 『날개』를 읽지 않고 후대에 일반 대중을 염두에 두고 편집된 텍스트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일 듯하다.

이러한 사태를 두고 나는, 사실상 맹점이라 할 우리 시대 문학작품 연구의 특성을 생각해 본다. 연구자의 문학관이 연구의 전 과정을 지배하다시피 하는 것, 이것이 문학작품 연구 거의 전부에서 흔히 보이는 특성이다. 연구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문학형이 무엇인지, 그가 어떤 문예사조를 좋아하는지에 따라, 동일한 대상을 두고서도 연구 방법론의 설정에서 평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이를 연구자의 이상이 연구에 미치는 영향이라고 보면, 문학작품 연구만의 특성이 아니라 할 수도 있다. 넓게 원리적으로 볼 때 모든 학문에서 어느 정도는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인 까닭이다. 학적인 연구가 순수 추상 차원에서 곧 엄밀한 이론의 장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경우는 실제로 없다고 할 수 있다. 

실제의 필요에 부응하는 공학은 물론이요 자연과학조차도 그렇지 않다. 연구를 가능케 하는 연구비 지원에서부터 현실의 필요와 경제 사회적인 판단이 깊숙이 개재하게 마련이니, 하나의 분과 학문을 두고 말하자면 연구 논리만으로 이루어지는 연구 분야는 없다고 할 만하다. 특정 분과 학문의 연구는 이렇게 연구자 개인이나 집단의 이상은 물론이요 사회의 학문 외적인 논리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날개』의 사례에서 짐작되듯이 문학작품 연구에서 확인되는 유사해 보이는 특징은 사실 성격이 다르다. 문학작품 연구에 연구자 집단이나 사회가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문학작품 연구가 다른 연구들과 문제적으로 구별되는 것은 대체로 연구자가 연구 대상을 대하는 태도 면에서의 특징 때문이다.

연구 대상인 작품이 포함되는 실제 곧 문학계·연구계에 영향을 행사하려는 욕망을 품고 있다는 것이 그러한 태도의 핵심이다. 어떠한 유형의 문학작품이 훌륭하고 어떠한 문학 갈래가 문학사의 주류인지를 주장하는 연구나 평론은 모두, 문학계가 그러한 주장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변화·발전하기를 기도한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현대문학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거나 그 하위 갈래인 리얼리즘 문학 혹은 모더니즘 문학이 무엇인지 그 정체성을 규명하려는 시도의 대부분이, 검토 대상의 실체를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자신이 정의한 대로 향후 발전하거나 해석되기를 도모하는 미래 기획에 해당한다. 이런 면에서 그러한 시도들은 이론 차원의 연구가 아니라 이데올로기 차원의 실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가 이상이다. 과연 그는 어떤 절망을 느꼈던 것일까. 사진=위키백과

 

문학 연구에서 나타나는 이데올로기

문학작품에 대한 논의가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띠는 것 자체를 두고 어떻다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연구가 이론 차원의 작업이 되려면 이데올로기와의 경계에 대한 자의식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문학작품의 연구와 이데올로기적인 담론으로서의 평론의 경계를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는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역사적인 가치 판단을 내세우는 정론적인 평론이든 그 자체가 작품이고자 하는 예술 평론이든, 평론은 평론가의 가치판단에 크게 좌우되는 것이어서 기본적으로 주관적이다. 이러한 주관성, 미래에 대한 소망의 표현으로서의 이데올로기성이 의식되지 못하면, 연구 논문으로 출판된 경우라 해도 그것은 연구라 할 수 없다.

문학작품의 연구가 평론과 자신을 구분하면서 이론으로서의 지위를 보다 강화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연구 대상인 실제에 충실을 기하는 것이 기본이다. 이러한 기본을 지킬 때 연구 논문에 대한 이론적인 상호 검증 또한 가능해진다. 현재도 상호 검증이 없지는 않지만 그 기준이 실로 문제적이다. 문예학에 국한하지 않고 철학과 미학, 사회학 등에서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서구의 이론을 끌어와 연구다운(?) 면모를 갖추고자 하는 서구 중심주의적인 풍토가 오래 지속되면서, 누가 최신 이론을 먼저 그리고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가 기준 아닌 기준으로 행세하는 형국이다.

이러한 어불성설 사태를 지양하고 『날개』와 같은 부끄러운 사례를 없애기 위해서는, 연구 대상인 텍스트에 충실을 기해야 한다. 기본을 지키는 제대로 된 연구들이 축적될 때 그것을 귀납해 우리 문학에 대한 이론 또한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실증 차원에서 출발해 스스로 이론이 되고자 하는 노력만이 문학작품 연구의 학적인 성격을 강화하는 유일한 길이다. 문학작품 연구에 대한 국가 사회의 지원을 요구하는 것은 그다음 일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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