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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혼돈의 경계에서 본 생명은 아이러니
질서·혼돈의 경계에서 본 생명은 아이러니
  • 정우현
  • 승인 2023.12.15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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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서평_『기계 속의 악마』 폴 데이비스 지음 | 류운 옮김 | 바다출판사 | 416쪽

생명은 어떤 개체라기보다는 하나의 과정
인과적이면서도 물리적인 실재로서의 생명

하나의 유령이 물리학과 생물학의 경계를 떠돌고 있다. ‘기계 속의 악마’라는 유령이. 이 악마는 물리학에서 종종 언급되는 ‘맥스웰의 악마’와도 비견되고, 또는 생물학에서 생명 현상을 지배하는 의식의 존재를 논할 때마다 등장하는 ‘데카르트의 악마’를 떠올리게도 한다.

누구나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을 직관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생명체와 생명이 없는 물질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이 오랫동안 씨름해왔음에도 생명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표준 정의 같은 것은 여전히 만들어지지 못했다. 19세기 말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은 생명체가 생존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엔트로피를 낮추기 위해서라고 말했는데, 후에 에르빈 슈뢰딩거는 그의 이론을 채용해 생명을 ‘음의 엔트로피를 먹고사는 존재’라고 규정했다. 물리학자가 본 생명은 열역학법칙을 거슬러 일하는 기계와 같은 존재인 셈이다.

20세기 말 외계생명체 추적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NASA의 생물학자 제럴드 조이스는 스스로를 유지하면서 진화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생명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기준에 의하면 생명은 어떤 개체라기보다는 하나의 과정이다. 21세기 들어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생물학자 폴 너스는 ‘정보’로 생명을 설명했다. 생존을 위해 정보에 의존한다는 점은 생명이 ‘목적’을 가지고 행동한다는 뜻이다. 생물학에서 ‘목적론’을 들먹이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럽기 마련이지만, 너스는 살아 있는 존재가 ‘목적을 지닌 전체’로 작동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폴 데이비스 미국 애리조나주립대학교 비욘드 연구소장의 새 책 『기계 속의 악마』도 정보의 개념을 다룬다. 에너지처럼 물질에 생기를 불어넣는 능력을 가진 추상적 양으로서의 정보이다. 저자는 이론물리학자답게 분자적 혼돈에서 질서를 만들어내면서도 아무 에너지도 쓰지 않는 가상의 존재인 맥스웰의 악마를 다시 소환하며 새로운 주장을 펼친다. 분자들이 만들어내는 정보를 선별하며 의미 있는 활동을 수행하는 상상 속 악마 같은 존재들이 우리 몸속에 이미 들어있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정보는 엔트로피와 정반대의 개념에 해당한다. 점점 증가하는 엔트로피로 인해 붕괴해가는 세계 속에서 정보는 질서라는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생명의 본질이 아니고 무엇일까? 혼돈에서 질서를 불러내 엔트로피의 부식 효과를 피해 갈 수 있도록 설계한 악마라 할지라도 열역학 제2법칙을 어길 수는 없다. 그러나 저자는 거기 담긴 정신만큼은 속일 수 있다고 말한다. 물질이 가지는 양자적 속성이 생명의 악마로 하여금 술수를 부리게 한다는 것이다. 

양자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통해 생물학적 정보 처리의 과정이 양자역학에 어떻게 의존하는지 조만간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마음과 의식이 어떻게 몸을 구성하는 물질과 물리적으로 연결될 수 있을지 고심했던 데카르트의 문제에도 더 가까이 접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순진한 기대는 아닐까? 양자적 우연성으로 설명하기에 생명은 너무나도 질서정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누스적인 이중성과 불확실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양자는 생명을 많이 닮았다. 이들은 관찰자와 관찰 당하는 존재의 관계로 끈질기게 엮이기도 한다. 

슈뢰딩거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물리학에는 원자 연구만 있는 게 아니고, 과학에는 물리학만 있는 게 아니며, 삶에는 과학만 있는 게 아니다.” 참으로 적절한 통찰이 아닌가. 생명 현상을 물리학과 적절하게 합쳐 설명하기 위해서는 정보적 관점을 뛰어넘는 완전히 새로운 물리학이 필요하다. 모든 생명이 ‘목적 행동’을 가진다는 것을 단순히 진화의 결과로만 받아들이는 기존의 생물학에도 어딘가 부족함이 느껴진다. 

생명이란 무엇일까? 목적이 담긴 정보를 품고 있는, 인과적이면서도 물리적인 실재로서의 생명. ‘악마’와 같은 은유가 아니고서는 설명하기조차 어려운 비물리적 현상들. 생물학자 크리스티앙 드뒤브가 말했듯 생명은 ‘우주적 명령’과도 같은 절대적 운명일까? 생명을 이해하는 일이 여전히 과학에 달린 문제라고 확신하는 이가 있다면 이 책을 반만 읽은 것이다.

 

 

정우현 
덕성여대 약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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