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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적 평가, 논문이냐 저서냐
연구실적 평가, 논문이냐 저서냐
  • 김병희
  • 승인 2023.12.11 08: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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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_ 김병희 편집기획위원 /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김병희 편집기획위원

대학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교수의 연구실적 평가는 논문 영역과 저서 영역으로 나눠 평가한다. 대체로 논문이 저서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심지어 논문은 연구실적으로 인정하지만 저서는 인정하지 않는 대학도 있다. 그래서 교수들의 저서 출판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렇게 되면 교수들의 논문 편식이 우리 학계에 심각한 문제로 떠오를 수 있다. 전문 지식을 일반인과 소통한다는 차원에도 저서 출판은 필요하다. 

논문 위주의 연구실적 평가는 물론 긍정적 측면도 많다. 학술 논문은 익명의 심사과정을 거쳐 검증받기 때문에 연구의 품질을 높일 수 있고, 연구 결과를 학계에 공유함으로써 지식의 교류를 촉진하기도 한다. 단독이든 공동이든 논문은 연구 성과를 게재 편수와 비율로 집계하기 때문에 연구자의 전문성과 실적을 명확히 드러낼 수 있고(연구 성과의 가시성), 학문 간이나 연구자 간에 치열하게 경쟁하는 환경에서 연구자가 자신의 위치를 정립하고 연구비를 확보할 때도 논문 실적은 분명 도움이 된다.

하지만 논문 위주의 평가는 부정적 측면도 있다. 양적 평가의 압박 때문에 연구자들이 질보다 양에 집중함으로써 논문의 가치나 혁신성이 떨어질 수 있고, 게재 가능한 연구에만 치중함으로써 중요한 연구 주제가 소외될 가능성도 있다. 논문 위주의 평가는 학문적 다양성을 제한하고, 논문 편수에 대한 지나친 압박은 연구자에게 과도한 스트레스를 주고 연구 환경을 악화시킬 수 있다. 나아가 연구자가 단기적인 연구 성과에만 관심을 가질 테니 장기적이고 본질적인 연구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경시할 수도 있다.

논문 위주의 평가는 연구의 질과 가시성을 높이는 데는 기여할 수 있겠지만, 연구의 다양성과 혁신성을 저해하는 동시에 연구자에게 부담감을 안길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논문과 저서 간에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 연구실적 평가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저서도 연구실적에 포함시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서는 어떤 주제에 대해 심도 있고 포괄적으로 다룬다. 연구자는 저서를 통해 자신의 이론이나 생각을 보다 깊이 있고 체계적으로 정리함으로써 학문적 깊이와 폭을 확장할 수 있다. 모든 학문 분야가 논문 형식에 적합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예컨대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일부 분야에서는 다양한 학문 분야를 넘나드는 지식을 책으로 써서 소개할 수도 있다. 나아가 저서는 일반 대중에게 학문적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에, 저서는 학문의 사회적 영향력을 높이는 동시에 전문 지식을 일반 대중과 소통하는 데도 기여한다.

연구실적 평가에 저서를 포함시키는 것은 학문의 다양성과 깊이를 존중하고, 학문적 지식의 사회적 전파를 촉진하는 중요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논문에 나타난 지식은 소수의 전공자들 사이에서만 유통되지만, 저서에 나타난 지식은 대중에게 확산된다. 깊이 있는 연구와 사유가 필요한 주제는 저서에서 보다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논문 위주로만 연구실적을 평가한다면 이와 같은 깊이 있는 연구를 지속하기 어렵다.

논문 제일주의가 지성의 황폐화를 초래한지 이미 오래됐다. 나도 교수 생활 24년 동안 110여 편의 학술논문을 국내외 전문 학술지에 게재했는데, 과연 그 논문들이 얼마나 깊이 있는 연구였는지 자신 있게 단언하기 어렵다.

혹시 살점은 없고 마른 나뭇등걸처럼 뼈만 앙상한 지식은 아니었을까? 논문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논문도 중요하지만 저서도 논문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논문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책을 쓰지 않는 어떤 교수가 저서란 이런저런 것들을 짜깁기해서 묶어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과연 그럴까? 그런 선입견이 정말로 심각한 문제다.

모든 학문 분야가 논문 게재에 적합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일부 분야에서는 저서가 더 중요할 때도 있다. 저서는 전문지식을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전달하고, 학생들에게 전공지식을 폭넓게 접근하게 함으로써 교육의 질을 향상시킨다.

여러 학문 분야의 지식을 통합해 학문 간의 연결을 시도하고, 단순한 데이터 분석을 넘어 저자의 지식이나 아이디어를 보다 창의적이고 포괄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매개체가 바로 책이다. 교수의 연구실적 평가나 교수 자신의 연구 관심사에서 논문 편식증 혹은 저서 거식증을 하루빨리 치료해야 한다. 그렇잖으면 한국 지성계가 머잖아 큰 코 다치게 될 것이다. 

김병희 편집기획위원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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