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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 이단자는 왜 교수직을 그만뒀나
동양화 이단자는 왜 교수직을 그만뒀나
  • 이근우
  • 승인 2023.12.06 0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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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창배 전 이화여대 교수를 기리며

작품 제목에 시간을 허비할
틈조차 없어 무제로 할 정도로
그에게 창작의 단절은 있을 수 없었다.
백봉리 창작 전념 시기는 그의 삶과 
예술이 가장 빛나 보이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황창배 화가(1947∼2001)는 31세의 나이에 1978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서 「秘51」 작품으로 국전 사상 처음으로 동양화 비구상 부분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그는 한국 화단계에 이목을 집중시켰다. 

‘황창배’ 하면 떠올리는 별칭이 있다. △동양화단의 이단자 △격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 △자유분방 △테러리스트 △선구자 △황창배 신드롬 △회화의 무법 △고독한 자유인 등이다. 그의 남다른 작업 행보에 대한 미술계의 관심이라 하겠다. 

박수근, 김환기, 이중섭, 황창배, 장욱진, 남관, 천경자, 김흥수, 김기창, 유영국은 국내 미술 애호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이다. 그 속에 황창배의 이름이 선명하다. 그는 특정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조형 의지 표현, 자유분방한 비정형에서 새 조형 양식 찾아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화단계에 ‘황창배 신드롬’을 일으켰다.

황창배 전 이화여대 교수(동양화과)는 오로지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 연고도 없는 충북 괴산군 청안면 백봉리로 향했다. 사진=『황창배 작품집』(동덕자여대학교 2003)

 

작품활동 전념 위한 고독한 결단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감각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작품을 완성시키는 노력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예술 그 자체가 인간이 재기와 창의력을 바탕으로 하여 탄생됩니다. 스스로 주위 환경을 조성하여 영감을 얻고, 충동을 유발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림은 환경이나 화가의 심리 상태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탈출은 자신의 독창성을 향한 하나의 몸부림입니다.”(황창배)

창작을 위한 탈출일까? 황창배는 어느 날 먼지 같은 겉치레를 털고 작품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고독한 결단을 한다. 1991년 이화여대 동양화과 교수직을 사임하고 오지 중에서 오지인 산골 충북 괴산군 청안면 백봉리에 칩거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당시 사회적으로 덕망 있고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교수직을 사임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다. 

이러한 그의 결정은 주위의 어떠한 눈길도 의식하지 않은 채 마음먹은 대로 창작 작품에 전념하면서 제 갈 길만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그의 체질에 맞는다는 생각에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선택 또한 당시 많은 사람에게 적지 않은 관심의 화두가 되었다.

황창배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괴산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다. 그는 그냥 괴산이 좋아 어설픈 작업실 하나를 짓고 그렇게 그곳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렇게 그가 선택한 백봉리는 그의 삶과 예술에 있어 매우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그러므로 황창배의 삶과 예술에 있어 백봉리 작업실을 빼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황창배 화가의 백봉리 작업실이다. 사진=이군우

 

백봉리 작업실에 잠들다

창작 욕구가 많았던 그의 삶 가슴 한편에는 늘 작업실을 향한 갈망이 있었다. 그에게 절실한 창작 집념을 풀어 줄 작업실이 없다는 것은 마치 한쪽 날개가 없는 새와 같다. 그 한쪽 날개를 달아 준 것이 백봉리 작업실이다. 그가 그렇게 갖고 싶었던 백봉리 작업실에서 마음껏 자유롭게 창공을 날 수 있는 날개를 갖고 그만의 작품세계를 하늘에 그려냈다. 그 하늘만큼 그의 창작의 세계는 넓고 컸으며, 그 하늘과 같이 큰 종이를 채워준 것이 백봉리 작업실이다. 

백봉리 작업실은 그의 창작 작품을 향한 예술가로서 열정이 쉼 없이 펼쳐진 곳이다. 화산의 용암처럼 솟구치는 창작에 대한 집념의 불덩어리를 분출한 곳이다. 하지만 그 열정을 다 토해내지 못하고 54세의 나이로 그는 창작의 꿈을 접고 그곳에 뼈를 묻었다. 이것이 황창배 백봉리 작업실의 삶과 예술이다. 그의 삶과 예술에서 백봉리 창작 전념 시기는 백봉리 전과 후의 창작 작품 경향과 삶에 있어 다른 점을 살펴볼 수 있는 시기이다. 황창배의 총 9회 개인전 중 여섯 번의 개인전이 백봉리 작업실에 있을 때이다. 

황창배의 삶은 오로지 창작 전념의 연속이었다. 그가 백봉리 작업실을 선택한 이유이다. 즉, 끊임없는 창작의 연속으로 단절을 피하기 위함이다. 작품 제목에 시간을 허비할 틈조차 없어 무제라고 할 정도로 그에게 창작의 단절은 있을 수 없었다. 백봉리 창작 전념 시기는 그의 삶과 예술이 가장 빛나 보이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황창배는 아이들을 무척 사랑했다. 백봉리의 삶과 예술에 있어 또 하나의 행복한 시간이 있었다면, 그것은 백봉초등학교 학생을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그는 사비를 들여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총 여섯 번의 ‘백봉 어린이 그림 잔치’를 개최했다. 그가 아이들과 행복해하는 모습은 백봉초등학교 그림 잔치 행사 관련 자료집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필자는 2021년 7월 4일 백봉리 작업실을 찾았다. 작업실 입구 마당에는 잡초가 꽤 자라 있었고, 철문으로 된 작업실 문과 안에 나무로 된 현관문은 잘 열리지 않았다. 작업실에 들어서자 고인이 평소에 사용하던 종이·물감·책 등이 필자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잠시 가슴이 먹먹했다. 그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없이 그냥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황창배가 영원히 잊을 수 없었던 1978년, 그의 불꽃같았던 삶과 예술, 어느새 45년이라는 시간을 마주하고 있다. 세상의 무상함이라고 할까. 그의 백봉리 작업실은 우리 곁에서 멀어진 지 오래된 듯하다. 그가 그렇게 갖고 싶었던 백봉리 작업실, 2023년 깊어가는 단풍 속에 작업실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그동안 20여 년 작업실의 문은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이제 우리가 그 닫힌 문을 활짝 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근우                                           
중원대 교수·동양화
중국 남경예술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만 의난현 예술학회 고문이자 동서미술문화학회·한국동양예술학회 회원이다. 『연풍현감 김홍도와 상암사 이야기』 등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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