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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생성과 인지 : 살아있음의 실현
자기생성과 인지 : 살아있음의 실현
  • 김재호
  • 승인 2023.11.07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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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또 R. 마뚜라나·프란시스코 J. 바렐라 지음 | 정현주 옮김 | 갈무리 | 336쪽

급진적 구성주의의 고전 『자기생성과 인지』는 살아있음을 실현하는 조직의 기제로서 ‘자기생성’ 개념을 제안한다. 또 이 책은 인지를 생물학적 현상으로 규정하며, 인지야말로 모든 살아있는 체계의 본성이라고 본다. 이러한 제안은 철학의 영역이던 인식론을 생물학과 과학의 분야로 전환시키는 강력한 계기가 되었다.

『자기생성과 인지』는  살아있는 체계를 관찰과 기술의 대상 혹은 상호작용하는 체계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만을 준거하는 자족적 단위체로 정의한다. 그리하여 예를 들면 어떤 관찰자가 ‘외부’에서 단위체들을 기술하는 관점은, 이미 마뚜라나와 바렐라가 체계 그 자체의 특성으로 상정하는 것의 근본적인 필요조건을 위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이른바 자율적이고 자기준거적이며 자기구축적인 폐쇄적 체계를, 즉 자기생성체계를 상정한다.

이 책은 살아있는 체계에서 신경계의 작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을 폐쇄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뉴런들의 연결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신경계의 활동이 신경계 자체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결정론적 접근방법을 통해, 신경계의 폐쇄적 작동의 역학에 근거한 상호작용 체계의 신체성을 생물사회학의 근간으로 제시한다.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지각한다는 것

1928년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태어난 움베르또 마뚜라나는 1948년부터 칠레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1954년부터 영국과 미국으로 유학하여 생물학을 연구했다. 1958년 하버드대학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근무했다. 1960년 산티아고의 칠레대학으로 돌아온 마뚜라나는 두 개의 과업을 맡게 되었다. 하나는 의대생들에게 일반 생물학을 강의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경생리학과 신경해부학 분야의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한편에서는 의대생들에게 지구상의 살아있는 체계들의 특징과 기원을 강의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개구리의 형태 시각에 관한 연구 결과들을 새의 형태와 색지각 연구에 적용하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고 마뚜라나는 『자기생성과 인지』의 서문에서 회고한다. 첫 번째 질문은 ‘살아있음의 조직은 무엇인가?’이며, 두 번째 질문은 ‘지각현상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이다. 

살아있음의 조직이란 무엇인가?

강의 시간에 의대생들로부터 ‘살아있음의 조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마뚜라나는 자신이 명쾌한 답변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쓴다. 살아있는 체계의 특징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살아있는 체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까? 대학 교수로서 마뚜라나는 재생산, 유전, 성장, 진화, 적응 같은 살아있는 체계의 특징들을 나열하고 설명할 수 있었지만, 그 목록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끝을 알기 위해서라도 살아있는 체계가 갖는 불변의 특성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뚜라나는 ‘목적’이나 ‘기능’, ‘사용’처럼 외부적인 것에 준거하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살아있는 체계의 특수성과 자율성을 적절히 기술할 수 있는 언어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69년에 처음으로, “살아있는 체계란 자신의 구성요소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기본적인 순환성을 통해 단위체들로 정의되는 체계”라고 마뚜라나는 정식화했다.

지각현상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마뚜라나는 1950년대 후반에 미국의 인지과학자 제리 레트빈과 개구리 시각에 관한 몇 편의 논문을 함께 썼다. 이후 다른 연구자들과 색지각 연구를 이어갔고 점차 신경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경계 활동을 외부 세계가 아니라 신경계 그 자체에 의해서 결정된 것으로 다루는 그런 새로운 접근이 필요했다. 또 신경계의 작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경계를 닫힌 체계로 간주해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지각을 외부 실재에 대한 파악이 아니라 외부 실재에 대한 ‘특정화[구체화]’(specification)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외부의 정보가 신경계에 입력되어 행동으로 출력되는 것으로 인지와 행동 과정을 이해한다. 그러나 마뚜라나는 “폐쇄적 신경망으로서의 신경계에는 입력과 출력이 없다”(292쪽)고 말한다. 입력과 출력은 오직 외부 관찰자가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뚜라나에 따르면 “유기체가 환경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얻는가?”라는 질문은 “유기체는 스스로가 존재하는 매질(medium)에서 적절하게 작동하는 구조를 어떻게 갖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 

「인지생물학」(1970)의 탄생

『자기생성과 인지』의 본문은 크게 두 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1편은 「인지생물학」(1970)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1969년 3월 시카고에서 열린 한 심포지엄에서 마뚜라나가 발표한 글을 확장한 것이다. 이때 마뚜라나는 살아있는 체계의 조직에 대한 탐구와 지각현상에 대한 탐구가 결국 동일한 현상에 대한 것임을 발견했다고 쓴다. 다시 말해서, “인지와 살아있는 체계의 작동은 같은 것이다.”
아직 ‘자기생성’ 개념을 발명하기 전이었던 마뚜라나는 이 글에서 ‘순환조직’, ‘자기준거체계’ 같은 개념들로 살아있는 체계를 설명한다.

마뚜라나는 「인지생물학」의 집필은 자신이 어떤 초월적 경험에 이르는 길이었다고 쓰면서 이를 다음과 같이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물질은 정신의 창조(담론 영역에서의 관찰자의 존재 양식)이며, 정신은 바로 그것이 창조하는 물질의 창조라는 발견에 이르는 길이었다. 이러한 점은 역설이 아니라, 인지영역에 있는 우리 존재의 표현이며 이 영역 안에서 인지의 내용은 인지 그 자체이다.”(29쪽)

말해진 모든 것은 어떤 관찰자가 말한 것이다

『자기생성과 인지』의 1편 「인지생물학」이 던지는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과정으로서의 인지란 무엇인가?
2) 인지는 어떻게 수행되는가? 

이 글에 따르면 인지는 반드시 생물학적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인지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는 곧 관찰자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연결된다. “말해진 모든 것은 어떤 관찰자가 말한 것이다”라는 유명한 문장은 우리가 인지를 하나의 생물학적 현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지를 규명하고 있는 관찰자와 관찰자의 역할까지 설명에 포함시켜야 함을 지적한다. 그리고 관찰자 또한 살아있는 체계라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관찰자를 포함하여 살아있는 체계는 자기생성적 순환조직이고 이 순환조직이 상호작용 영역들을 구체화한다. 살아있는 체계가 인지적 상호작용에 진입할 때, 살아있는 체계의 내적 상태(가령, 동물의 신경계의 기능)는 스스로의 인지영역을 확장하면서 살아있는 조직을 유지하는 순환방식에 종속된다. 

「자기생성 : 살아있음의 실현」(1973)의 탄생
『자기생성과 인지』 2편에 수록된 논문의 제목은 「자기생성 : 살아있음의 실현」(1973)으로, 움베르또 마뚜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가 함께 쓴 것이다. 살아있는 체계의 조직을 설명하는 용어로서 ‘순환조직’이라는 낱말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느낀 두 사람은 돈키호테에 관한 한 논문에서 착안하여 ‘자기생성’(autopoiesis)이라는, 이후 전 세계적으로 여러 학문 분야에 영향을 미친 역사적인 개념을 발명하였다. 자기생성 개념은 사회학, 인공지능 이론, 조직이론, 가족치료 같은 많은 분야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마뚜라나에 따르면 「자기생성」은 「인지생물학」의 한 절인 ‘살아있는 체계’의 내용을 확장한 것이다. 마뚜라나는 「자기생성」의 목표가 “자기생성이 살아있는 체계의 조직을 특성화하는 데 있어서 필요충분조건이라는 점, 그리고 적절한 역사적 우연성들이 주어진다면 우리가 살아있는 체계를 물리적 공간 내의 자기생성체계로 특징짓는 과정에 의해서 모든 생물학적 현상학을 도출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30쪽)고 설명한다. 

살아있는 체계들은 자기생성기계이고, 자기생성기계들은 자율적이다
『자기생성과 인지』의 2편 「자기생성」의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살아있는 체계에 공통된 조직은 무엇인가? 
2. 살아있는 체계들은 어떤 종류의 기계인가? 
3. 재생산이나 진화를 포함하는 살아있는 체계들의 현상학이 어떻게 자체의 단위체적 조직에 의해서 결정되는가?

마뚜라나에 따르면 환경과 유기체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 분명하게 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명확하고 정밀한 관념과 정의가 필요하다. 2편「자기생성」은 1편 「인지생물학」에서 설명한 살아있는 조직의 재귀적 ‘순환성’이야말로 단위체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유기체가 이 순환성에 종속되어 변화하는 환경과의 연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서 항상 변화를 허용하면서도 자신의 지속성을 확보해낸다고 설명한다. 마뚜라나와 바렐라에 따르면 살아있는 체계를 구별하는 것은 순환적이고 자기생성적인 조직의 형태이다. 

자기생성 이론은 몸과 마음의 데카르트적 이분법을 극복한다

『자기생성과 인지』의 이론적 의의로 크게 두 가지가 언급되곤 한다. 하나는 인지과정을 생물학적 과정으로 간주하는 근본적인 관점 전환을 이루어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관찰자의 발견이다. 
물리학자이자 시스템 이론가인 프리초프 카프라는 저서 『생명의 그물』에서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인지이론이 살아있는 체계의 모든 현상학을 하나의 총체로 보는 포괄적 이론이라고 평하면서 이들의 이론적 성취가 마음, 물질, 생명을 최초로 통합하여 데카르트적 이분법을 실질적으로 극복하는 것이라고 소개한다. 서양의 철학과 과학의 전통에서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은 오래된 것이다. 이 전통에서 정신과 몸은 정신이 몸을 지배하는 위계 관계 속에 있다. 

그러나 『자기생성과 인지』는 모든 수준의 살아있는 체계에 적용 가능한, 살아있는 것들의 본성에 대한 일관된 과학적 정의와 프레임을 제공하여 생물학적 과정으로서 정신과 물질, 과정과 구조는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논증한다. 나아가 마뚜라나와 바렐라는 유전자나, 종, 사회/집단 등에 대한 목적론적인 강조가 이론체계 안에서 개체의 소멸을 정당화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형태를 갖춘 무목적 체계로서의 개체의 자율성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통해서 강조점을 다시금 개체로 돌려놓는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문예출판사, 1994)에서 자기생성 이론이 주체-객체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종래의 전통 형이상학 사유를 대체하며, 비-존재론적 체계의 메타 생물학적 사유를 제기한다고 본다.  

관찰자와 급진적 구성주의

관찰자의 발견은 실재와 객관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실재는 아는 자의 마음속에 반영된, 관찰자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의 세계가 아니다. “말해진 모든 것은 관찰자가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과학적 설명체계가 불가피하게 관찰자의 입장을 포함한다면, 모든 인식 행위는 지각과 외부 실재의 지점 간의 대응이 아니라 관찰자의 구성에 반드시 의존하는 것이다. 

관찰자의 존재론에서 언어가 수행하는 역할에 주목하여 언어를 살아있음과 인식을 통일하는 인식론이 출현하는 메커니즘으로 간주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에 따라 우리가 인간을 생물학과 문화의 재귀적 관계에 기반하는 단위체로 간주할 수 있다면, 언어 구사하기(languaging)는 비로소 인간이 학습하는 근거, 우리가 하나의 세계를 앞에 내놓으면서, 학습의 재귀적 연결고리 속에서 공동 조정된 행동에 대한 공동 조정된 행동을 구축하게 해주는 근거로 출현한다.

따라서 관찰자에 대한 관점은 구성적 존재론의 수용을 요구하며 실재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를 이끌어 존재론적·철학적 변화를 동반한다. 관찰자의 발견은 인공지능학자, 생물학자, 심리학자, 커뮤니케이션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학제간 연구인 급진적 구성주의의 중심축이 되었다. 그리고 『자기생성과 인지』는 이 학파의 중심 문서로 자리매김하였다. 

움베르또 R. 마뚜라나(1928~2021)와 프란시스코 J. 바렐라(1946~2001)의 활동 

마뚜라나는 우리의 인지과정이 세계에 대한 지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면서 실재가 객관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담론의 관계영역에서 관찰자들의 기술행위에 의한 감각지각적-작동적-관계적 공통의 구성물이라는 테제를 일생 동안 해명했다.

그의 설명체계는 살아있는 체계(자기생성), 언어와 인지(언어생물학과 인지생물학), 인간다움(사랑의 생물학), 문화(문화생물학)까지 포괄한다. 마뚜라나는 씨메나 다빌라 야네쓰와 함께 2000년에 칠레 산티아고에서 <마뜨리스티카 연구소>를 설립했으며 이 연구소는 이후 문화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의 방식과 관계적 본성을 연구하는 학교가 되었다. 

프란시스코 바렐라 역시 마뚜라나와 함께 생물학에 도입된 자기생성 개념의 공동 창시자로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후로는 자기생성 이론과 그 이론 너머로 확장되는 쟁점과 개념을 탐구했다. 1987년에 과학과 불교 간의 대화를 촉진하기 위해 <마음과 생명연구소>(Mind and Life Institute)를 설립하여 두 영역 간의 연결고리로서 마음과학(mind sciences), 명상수행 등의 주제를 다루도록 지원했다. 1991년에 출간된 저서 『몸의 인지과학』(김영사, 2013)에서는 행화주의적 인지과학(enactive cognitive science)을 탐구하기 위한 기초 작업을 수행했다.

이 책에서 그는 중관불교를 끌어들여 인간의 정신현상에 접근할 때 서구 과학이 직면하게 되는 몸과 마음의 이원적 딜레마를 적극적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1988년부터 <프랑스국립과학연구원>의 연구 책임자로서 신경현상학이라고 명명한 새로운 분야와 의식연구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했다. 그의 일생과 저작 목록은 에반 톰슨이 쓴 「생명과 마음 : 오토포이에시스로부터 신경현상학까지」(『윤리적 노하우』, 139~175쪽)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뚜라나와 바렐라는 프리초프 카프라의 『생명의 그물』에서 산티아고 인지학파로 언급된다. 공동으로 작업한 자기생성이론 이후로 바렐라는 의식과 인지적 자율성에 집중하여 개체의 신경계를 실재의 유의미한 생산자로 보려고 한 반면 마뚜라나는 사회 또는 문화와 같이 더 큰 규모의 단위의 기반을 이루는 것으로서의 자기생성적 조직을 해명하는 경로를 따르면서 둘은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연구의 길을 걸어갔다. 

한편 이들의 자기생성 개념은 1980년대 초부터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학계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자율적 형태의 실재를 산출하는 과정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 개념은 시스템 사상, 가족치료, 사회학, 미디어연구, 과학학, 인식론, 심리학, 법학, 언어학에까지 널리 통용되는 유행하는 개념이 되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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