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8:20 (토)
‘가라열’처럼 가라
‘가라열’처럼 가라
  • 신희선
  • 승인 2023.10.30 08: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딸깍발이_ 신희선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신희선 숙명여대 교수

올해 노벨 경제학상은 클로디아 골딘에게 돌아갔다. 하버드대 경제학과 첫 여성 종신교수로서 노동시장의 젠더 불평등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한 골딘은 성별 임금격차와 유리천장의 문제를 최초로 제기했다.

『커리어 그리고 가정』이라는 책에서 대부분의 여성이 대학을 졸업 후 10년쯤 지나면 가사·양육과 같은 돌봄 노동을 떠맡으면서 직업적 커리어를 포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성역할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여성들의 ‘평등을 향한 기나긴 여정’을 다각도로 조사하며, 유연한 노동환경과 육아휴직 제공이 여성의 사회진출을 확대하는 관건이라고 하였다. 

골딘이 제기한 문제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2022년 OECD국가의 성별 임금격차는 평균 11.9%를 보이고 있다. 한국은 31.1%로 꼴찌다. 대학 진학률이 남학생을 앞서고 있지만, 대졸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63%에 불과하다. “시험으로만 하면 여자를 안 뽑을 수가 없어. 면접에서 말도 잘하고.” 대부분의 임원이 실력 있는 여성들이 많다고 인정한다.

그럼에도 여성에게 고용과 승진의 장벽은 여전히 높다. 임원으로 성장하는 여성은 손꼽을 정도다.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라고 질문을 던진 시인도 있지만, 여성이 처한 현실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똑똑한 여성이 늘어나고 있는데 여성 노동자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제자리 걸음이다. 현 정부 들어서는 외려 퇴행하고 있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정부 인식에 강한 의문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여가부의 2024년 예산안은 그나마 일궈온 성평등 사회를 퇴보시킨다”며 여성단체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예산 삭감만이 아니라 각종 정책과 조직 명칭에서 ‘여성’을 탈색시키고 있다.

부처 폐지를 자신의 중요한 과업으로 인식한, 자격 미달의 장관 후보자가 청문회 장에서 ‘엑시트(exit)’한 장면은 지금의 여가부 위상을 보여준 정점이었다. 업무에 대한 전문성만이 아니라, 여성권리를 위해 애써야 하는 장관으로서 젠더적 시각조차 결여되었음을 낱낱이 보여주었다.

아이린 파드빅과 바버라 레스킨은 『유리천장 아래 여자들』에서 “유리 천장보다 끈적이는 바닥이 더 문제”라고 말한다. 여성의 승진과 권한을 막는 유리천장만이 아니라 저임금이고 장래성과 비전이 없는 직종에 여성을 붙잡아두는 ‘노동에 붙은 성별꼬리표’를 가리킨다. 내부 노동시장 메커니즘으로 여성은 상급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직업사다리가 짧다며, 승진과 성장의 기회가 제한되는 여성의 ‘유리 천장’과 대비해 남성에게는 고속으로 승진하는 ‘유리 에스컬레이터’가 존재한다고 폭로한다.

이처럼 성불평등과 관련한 과제가 산적해 있는데 한국 정부는 역사를 거스르고 있다. ‘외국인 가사도우미’와 같은 단편적인 처방으로 상황을 개선하겠다고 나선다. 정치적으로 젠더 갈등을 이용하기도 한다. 

골딘은 한국의 “기업 문화가 세대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경제 규모를 고려해 볼 때, 남녀 임금격차와 여성의 경력단절, 유리천장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려는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고착화된 젠더 차별구조를 시장 논리로 해결하긴 어렵다.

결국 국가가 개입해 미래 세대를 위한 핵심 사안으로 접근해야 한다. 불평등한 관행을 바꾸고, 여성노동자의 권익이 침해받지 않도록 이미 만들어놓은 성평등 제도라도 일관성 있게 밀고 가는 자세가 중요하다. 여가부 해체가 능사가 아니다. 여성이 결혼이나 출산과 상관없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사회에서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정부가 팔 걷고 나서야 한다.  

여성 스스로도 자강의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여성이 나서서 문제를 드러내고 여성의 목소리로 투쟁의 역사를 써가야 한다. “우리 열 명이니 가라열이 어떨까요? 가라! 여성해방의 길로, 가라! 독재타도의 길로, 가라! 노동자 해방의 길로! 뭐든 다 되잖아요?” 서명숙은『영초언니』에서 자신이 대학시절 몸 담았던 ‘가라열’을 소개하며, 당시 남학생 중심의 조직 분위기에서 여학우끼리 모여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며 세상공부를 하다가 결국 민주주의와 사회변혁을 위한 길로 나서게 되었다고 했다.

현 정부가 여가부 장관 후보로 추천한 인물이나 여성문제에 대해 취하고 있는 행태를 보면, 70년대 ‘가라열’의 외침에 새삼 귀를 기울이게 된다. “가라! 여성해방의 길로, 가라! 독재타도의 길로, 가라! 노동자 해방의 길로!”

신희선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