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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꿈은 박사과정 학생이었다
나의 꿈은 박사과정 학생이었다
  • 조혜민
  • 승인 2023.10.16 08: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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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_ 조혜민 경찰대 범죄학과 박사과정

 

조혜민 경찰대 범죄학과 박사과정

대학원에 입학한 후, 주변 사람들에게 ‘졸업 후 계획’에 대한 질문을 받곤 했다. 아마 이건 대학원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며, 학위를 통해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어느덧 나는 박사과정 3학기지만 이 질문이 아직도 어렵다. 어떤 답을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나의 현실적인 꿈은 그저 ‘박사과정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2022년 3월, ‘전업 학생’으로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가난의 회전문’을 돌려야 했기에 아르바이트 제안 연락이 오면 신나게 그 일을 잡곤 하였다. 이런 상황을 보면 ‘전업 학생’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무색한 날들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좋았다. 원하는 수업 시간표를 선택할 수 있었고, 내가 노력하면 공부할 시간을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2022년 7월에 홍수를 마주하게 되었다. 다행히 내가 살던 원룸에는 비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당시의 그 일은 과거 집 천장의 물난리로 고생했던 날들을 일깨워 주었고, 다가오는 전세 계약에 맞춰 은행 대출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현실을 내게 알려 주었다. 이른바 ‘무직’인 내게 은행 대출이 나올 것인가. 대학원 입학 전, 직장 생활은 했지만 모아둔 돈 없이 무모하게 시작한 대학원 생활이었다.

하지만 패기만으로는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영역이 엄연히 존재했고, 기름칠이 되지 않았던 ‘가난의 회전문’은 유달리 뻑뻑해서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다. 4대 보험이 되는, 돈 버는 일을 해야만 하는 때가 온 것이다. 나는 급히 일을 구하기 시작했고, 저녁 수업을 들을 수 있는 대학원 근처에서 전일제 직장을 구하게 되었다. 운이 좋게도 말이다.

그래도 잊지 않으려고 했다. 나의 정체성은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연차를 모아 학과 세미나와 학회에 발표를 신청하며 아득바득 일상을 보냈다. 하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오전 7시 30분, 집을 나서 출근하고 오후 5시 30분, 퇴근해 대학원 수업을 들으러 갔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오후 7시 수업에 들어가 집으로 돌아오면 오후 11시 30분이었다. 주 3회 수업이 있었기에 수업이 없는 날에는 밀린 집안 일을 하고 과제를 했다.

그 결과 돌아온 건 매달 안정적인 월급, 은행 대출 성공과 함께 퇴행성 허리디스크라는 질환이었다. 그런데도 좋았다. 다달이 나가는 은행 이자와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고, 부끄럽지만 ‘일과 병행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대학원 생활의 페널티로써 이용하며 부족한 내 모습과 타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1년 가까이 시간을 보내고 나니 내가 대체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이 없어졌다. 허리디스크로 인해 오래 앉아있는 게 쉽지 않았고, 일도, 공부도, 건강도 모두 내 마음만큼 이뤄내지 못해 힘들었다. 그때 고민했다. ‘나는 공부를 계속해도 될까?’, ‘나는 공부에 투자할 만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말이다. 

내게 대학원이라는 선택은 욕심을 부리고 떼써서 얻어내는 것이었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 그럼에도 공부를 이어가는 많은 이들 역시 마찬가지이겠지만 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쉽게 초연해지기보단 자책하면서 그럼에도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딸’이었다.

경쟁에 치여 공부하는 게 싫어 고등학교 자퇴를 고민하던 나는 대학교에 들어가 무언가를 배우는 것에 신이 났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대학원에 가고 싶었고 이런 마음을 아빠에게 전하자 돌아온 답은 날카로웠다. “너는 되게 이기적이구나.” 사실 이 말이 상처였다기보단 너무 맞는 말이어서 계속 곱씹게 되는 말이었다. 4년제 대학에 갔으면 졸업 후,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지 고민하는 게 우선인데 속 편하게 공부하겠다니. 우리 집 형편상 이기적인 고민이었다.

하지만 내 고집도 고집이었다. 일하며 대학원 시험을 ‘몰래’ 보고 합격 통지서와 함께 퇴사하겠다며 아빠에게 ‘통보’했다. 결과적으로 아빠는 손뼉을 치며 좋아하긴 했지만, 석사과정을 하는 내내 아빠는 ‘얘가 박사까지 한다고 할까 봐’ 두려워하셨다. 고백하자면 나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석사과정만이 내가 ‘해도 괜찮은’ 욕심의 끝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나는 일을 하다가 퇴사한 후, 또다시 ‘몰래’ 대학원 지원서를 쓰고 ‘통보’하자 아빠는 말했다. “너는 왜 자꾸 안 되려는 걸 하려고 해.” 그렇게 대학원에 합격한 나를 보고 아빠는, 우리 가족은 결과적으론 좋아했다. 

2023년 9월, 또다시 나는 ‘전업 학생’이 되었다. 우선 허리 건강을 지키고 공부할 시간도 확보하자는 마음으로 퇴사하였다. 마지막으로 출근하고 퇴사하던 날, 아빠는 내게 “미안해, 딸”이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동안 나는 나의 형편을 탓하며 살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충분히 넉넉한 형편이었기에 그 틈에 나는 고집을 부리고, 이기적인 마음을 앞세워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마주해야만 하는 나와 우리 가족의 ‘자책감’과 같은 감정을 어떻게 마주하고 소화해야 하는지는 쉽지 않은 과제인 것만 같아서 움츠리게 된다. ‘내가 공부해도 될 만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하며 말이다. 그러다 보니 박사과정 학생이라는 꿈을 이룬 나는 현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아서 ‘미래’를 그리기가 벅차다.

시간이 흘러 박사학위를 받은 후, 어떤 일을 하며 지내게 될지도 잘 모르겠다. ‘박사과정 학생’이라는 정체성을 끝끝내 지켜내는 것이 무엇보다 나의 우선 과제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두고 ‘그게 무슨 고민이야’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런데도 이 상황과 고민을 글로 공유하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하나다. ‘이렇게 존재하는 나도 있어요’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번 기고를 통해 ‘학문후속세대’라는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다. 내가 가진 고민·경험·위치성이 학문에 도움이 되고 더 많은 이들이 용기 내어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다.

조혜민 경찰대 범죄학과 박사과정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 단국대에서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전공했다. 권력·제도가 구성되는 방식과 이것이 개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심이 많다. 최근에는 젠더폭력 범죄예방의 아웃소싱, 준강간에서의 약물 범죄 경향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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