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연구개발 예산이 2달 만에 졸속으로 16.6%(5조2천억 원)나 삭감됐다. 2% 증액을 기대했던 과학기술계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지난 6월 대통령이 주재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시작이었다. 대통령이 과학기술에 ‘약탈적 이권 카르텔’이라는 주홍빛 낙인을 찍어버렸고, 예산의 ‘전면 재검토’라는 극약처방을 내놓았다. 카르텔의 실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연구개발 예산의 삭감이 과학기술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기획재정부가 마련해서 교육부가 집행하는 6조1천300억 원의 ‘일반연구개발’ 예산에 인문사회 연구지원 예산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반연구개발 예산도 29.4%(1조8천억 원)나 줄었다. 아무도 연구개발 예산의 삭감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관망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일본의 역사왜곡 대응 예산’은 70%나 삭감된다. ‘독도 주권 수호’ 관련 예산도 25% 줄어든다. 지금까지 언론에 공개된 동북아역사재단의 사정이 그렇다. 식량자급률 통계 작성 사업도 폐지될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지면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할 것이 분명하다.
과학기술 투자에는 인문사회학계가 부러워하는 30조 원의 국가연구개발사업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부 투자의 2배가 넘는 70조 원의 민간 투자도 있다. 실제로 올해 처음 ‘100조 원 시대’에 진입한 우리의 과학기술 투자는 GDP(국내총생산) 대비 4.9%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 비율이 내년에는 3.9%로 축소될 모양이다. 과학기술 분야의 민간 투자 15조 원도 함께 날아간다는 뜻이다.
세계 과학계가 우리 과학기술 투자의 느닷없는 축소를 우려하고 있다. <네이처>와 <사이언스>도 우리의 예산 삭감 상황을 주목하고 있다. 세계 10위 권의 선진국인 우리가 기술 패권과 4차 산업혁명 시대를 향한 치열한 기술 경쟁에서 스스로 이탈을 선언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내년에 과학기술 분야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는 아무도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과학기술 분야의 청년 일자리가 줄어들고, 대학원 운영이 어려워질 것은 분명하다. 이공계 인력양성 예산이 81%나 줄었기 때문이다. 특히 기초과학과 정부 출연연구원이 직격탄을 맞는다.
실질적인 피해도 걱정스럽다. 슈퍼컴퓨터·중이온가속기·핵융합과 같은 거대 연구 시설은 가동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다. 전기요금을 감당하지 못해서라고 한다. 화려한 우주개발의 꿈도 당분간 접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의대 쏠림’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어렵사리 구축하고 있던 인문사회의 연구지원 사업도 크게 퇴화할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의 추락은 당혹스러운 일이다. 갑작스러운 추락의 원인을 치밀하고 냉정하게 분석해서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을 찾아내야 한다. 과학기술을 오로지 효율성 제고만 강조하는 ‘관리’의 대상으로 여기는 관료와 정책전문가들의 횡포를 경계해야 한다.
과학기술 투자를 관리하는 정책연구원(STEPI)과 기획평가원(KISTEP)이 모두 관료와 정책전문가들에게 포획됐다. 과학기술의 본질은 실종되고, 어설프게 베껴온 낯선 남의 정책을 강요하는 일이 고작이다. 인문사회의 연구지원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는 온전한 착각이다. 인문사회 연구정책 전문의 관료·전문가를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덕환 편집인
서강대 명예교수 /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