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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색의 제국론’ 새로운 유토피아인가, 제국의 부활인가
‘유색의 제국론’ 새로운 유토피아인가, 제국의 부활인가
  • 전성곤
  • 승인 2023.09.15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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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가 말하다_『국민의 경계: 오키나와, 아이누, 타이완, 조선』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 지음 | 전성곤 옮김 | 소명출판 | 949쪽

지속되는 제국주의 매체로서 ‘포섭과 배제’
정치적 언어에 지배되는 생활식민주의와 거리두기

① ‘만들어지는 경계’ 그 정치적 언어와 ‘앎의 세계’

‘탈식민주의’란 무엇인가? 본 역서의 저자인 오구마 에이지는 근대일본의 경계 지역인 오키나와・아이누・타이완・조선 등에 대한 정책론을 검증하고, ‘일본인’ 및 ‘일본’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 물음에 답하려 한다. 물론 오키나와 및 홋카이도를 일관된 ‘일본’으로 간주하고, 조선 및 타이완은 ‘일본’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식민지’로서 영유되었던 지역으로 그 차이성을 구분하기도 한다. 반대로 아이누와 오키나와도 일본의 ‘식민지’였는데, 그렇기 때문에 오키나와・아이누・타이완・조선은, 침략과 동화정책으로 ‘일본화’했다는 동일성을 갖는다고 논한다.

탈식민주의란 역설적으로 식민주의가 무엇인지를 반증해주고 재확인시켜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중요한 키워드는 정책론, 동화였고, 조선과 타이완 뿐만아니라 오키나와, 홋카이도를 콜로니로서 간주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와 피지배의 대립적 구도에 내재된 문제점을 제시한다. 오구마 에이지는 ‘일본에 의한 식민지지배’라는 표현으로 역사가 쓰여질 때, ‘일본’은 지배의 주체이고 피지배자는 저항의 주체라는 이분법적 단일함을 문제시한다. 즉 ‘일본’이나 ‘피식민자’ 내부의 상호대립으로, 가령 ‘일본’ 내부의 대립이나 ‘피식민지’ 내부의 지역․계급․성별 등의 차별이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한계점을 제시했다. 또한 ‘혼혈’자라든가, ‘일본’ 대 ‘식민지’의 외부에 있는 ‘서구’를 시야에 넣지 않았던 점 등을 지적한다. 그리하여 본 역서에서 오구마 에이지는 이러한 문제점을 모두 포함하면서 ‘일본’이나 ‘식민지’라는 개념 그 자체를 검증대상으로 삼는다. 

선험적인 인식론 즉 ‘일본인’의 경계는, 경계의 ‘안쪽’으로서 ‘일본’이 설정되고, ‘바깥쪽’이 ‘식민지’라고 상정하는 것 자체를 문제시하면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이 경계의 범위는 누가, 어떤 장소를 설정하는가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이나 ‘오키나와’는 어느 때는 ‘일본’의 일부가 되고, 어느 때는 ‘일본’과는 별개의 ‘식민지’가 된다. ‘일본’과 ‘식민지’ 중 어느 쪽에 분류되는가는 경계의 설정에 따라서 결정되기에 ‘일본’이나 ‘조선’이 고정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점에 착안하여 오구마 에이지가 묻는 것은 이 ‘경계 설정 양상’이었다. 따라서 본 역서에서는 이 경계 설정 양상을 고찰하기 위해 ‘일본’이나 ‘식민지’ 내부의 다양성을 의식하는 것이었고, 그와 동시에 ‘일본’ 대 ‘식민지’라는 이원적 문제가 아니라, ‘서구’까지도 포함하는 것을 시도했다. 즉 식민지 지배를 둘러싼 정책이 ‘서구의 이론’에 의거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본 역서는 탈식민주의를 논하기 위해 식민주의가 내지와 식민지의 다양성을 포함하고 서구에 의존하는 문제까지도 상정하면서 식민주의가 무엇인지를 고찰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이 문제의 핵심은 ‘세계사적’으로 전개된 담론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즉 서구와 동아시아, 동아시아 내부의 ‘관계성’ 혹은 ‘상관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분절되어 나오는 것이 지배와 피지배자가 갖는 주체화와 주체성의 문제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배자의 주체가 일본이고 저항적 주체는 피지배자로 단일화 되는 주체가 아니라, 지배자와 피지배자 양쪽이 무도 주체를 갖게 되는 문제로서 주체화와 주체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 둘은 엄연하게 다르다. 즉 주체화는 종속이고, 주체성은 프로세스이다. 후자의 ‘프로세스라는’ 말은 바로 주체를 갖게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탈식민주의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전자는 정치적 언어에 지배되는 ‘주체화=일상의 식민주의’라는 소외현상을 동반하게 된다. 문제는 이처럼 개인이 지배든 저항이든 주체 된다는 것이 동시에 비주체화되는 것이었고, 이것을 재고하는 것 또한 탈식민주의의 시작인 것이다.  

이 탈식민주의 논리에 답하기 위해서는 ‘식민주의’가 어떻게 ‘일상의 식민주의화→주체화→비주체화’로 변용되는가 프로세스를 설명해 내야만 한다. 이때 본 역서에서 담지하고 있는 것이 정책론의 시행인데, 이 정책론은 식민자든 피식민자든 그들의 주체를 결정해버린 것은 제도, 법률, 교육, 이데올로기라는 장치로서 ‘권력의 침입’이었다. 이 권력의 침입이라는 테제를 풀어내기 위해 위해 오구마 에이지는 ‘정치적 언어’ 즉 ‘정치적 언어로 표현된 ‘일본인’의 경계와 그 흔들림’을 고찰한다. 그리하여 문제의 초점을 ‘어떠한 형태로 정치적 언어가 구성되었는가’ 그와 동시에 ‘그러한 언어에 의해서 표현될 수 없었던 것은 무엇인가’에 두었다. 이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대위법(對位法)’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오구마 에이지는 ‘정치적 언어’를 매개로 하여 ‘일상의 식민지주의 문제’까지를 풀어냈다. 그것이 포섭과 배제라는 ‘대위법’론이기도 하지만, 주체의 예속화, 종속화의 문제까지로 확대시켰다. 다시 말해서 예속화나 종속화는 식민자나 피식민자 모두가 갖는 식민주의에의 함몰이었다. 이를 통해 오구마 에이지는 일본이 식민지지배를 위해 만든 담론들이 ‘변경 불가능한 것으로 민족 내지 국가를 주체로 한 내셔널 히스토리의 역사관과 결부시키는 프로세스’를 꿰뚫어 보는 것을 탈식민주의의 시작으로 간주한 것이다.  

동아시아의 자유와 평화는 ‘탈식민주의’ 시각에서 풀어야

오구마 에이지 게이오대 종합정책학부 교수. 사진=게이오대 연구자 정보 시스템

② 서구 흉내내기 속의 ‘자기소외’와 동화라는 ‘생활식민지’  

오구마 에이지는 일본인=지배자, 피지배자=피식민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다 함께 ‘식민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것을 역설적으로 설명해 준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생활식민지’라고 표현할 수 있다. 즉 일상적으로 전개되는 ‘지배권력’에 대한 인식의 종속 문제이며, 자아를 고정 불변적이고 재구성할 수 없도록 봉쇄당한 ‘갇힘’의 세계를 말한다. 이러한 논리는 다시 일본적 문맥 속에서 전개되었던 동화의 문제를 재고하게 해주며, 그 동화정책이 식민지지배의 기본적 개념이었다는 논리와 접속시켜 준다. 

일본은 식민지지배를 위해 서구의 간접통치와 직접통치의 방식을 수입한다. 단적인 예를 본다면 영국의 식민지 통치 방식을 제안한 커크우드의 간접통치로 논리로서, 식민지 현지인의 일본인화를 반대하는 정책이다. 동시에 이와는 반대로 이자와 슈지처럼 동화를 강조하는 논리가 부상되고 다시 이들을 절충하는 점진주의가 경쟁하게 된다. 이처럼 일본은 식민지지배를 둘러싸고 서구적 근대 국가만들기 방식을 흉내 내면서 식민지를 지배하고자 했지만, 결과는 오히려 일본인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일본인 정체성 문제로 나타나기도 했다.

일본은 서구인이 아니라는 점이 바로 ‘소외’ 현상을 가져왔고, 일본 제국은 서구적 세계관의 추종이라는 ‘식민주의’에 참입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일본은 서구를 기준에 두고 일본적 문명화와 일본인화를 혼효하면서 제국주의를 완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오히려 일본제국은 서구제국의 세계적 담론을 추종하지만, 오히려 그에 종속되어 버렸고, 다시 이를 동아시아에 대입하는 ‘비주체적’ 제국주의를 구축하게 된다. 

일본 제국은 지배가 의미하는 동화나 차이의 문제가 인간 세계의 인간적인 모습 혹은 본래적 의미로서 존중이나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일본 제국의 모습이 지배와 피지배라는 이분법의 세계에 갇히고, 그것을 일본인이라는 기준을 통해 포섭이나 배제를 결정하게 되는 세계사를 갖게 된 점이 그것이다. 단적으로 그것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 정치적 언어의 정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제국이 인식한 세계사는 단편적이었고, 그 단편적 인식을 통해 식민지지배가 가능하다고 인식하게 되는 한계성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피지배자인 일본제국 신민뿐만 아니라 일본인 자신들조차도 자율적 사고가 봉쇄되고, 세계 인식의 문제로서 주체적 의식의 상실이 전개되었다는 점을 의식하지 못하게 되었다. 

물론 오구마 에이지는 이러한 논리를 개념적 해석을 통해 전개하기보다는 오키나와, 아이누, 타이완 그리고 조선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과 협업의 모습 속에서 그려낸다. 오키나와는 이하 후유(伊波普猷)가 그러하며 조선에서는 박춘금의 역할이 그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식민자뿐만 아니라 피식민자도 동시에 일본인화 문명화의 논리에 갇히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추상적이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를 비주체화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다시말해서 ‘지배와 피지배’로 구분되는 세계관에 갇히는 오류적 인식=주체를 가리킨다. 이는 서구가 전개한 식민지 지배통치 방식의 전개와 수용을 정책 혹은 인물들을 통해 실체적으로 제시하면서 이를 증명해 낸다.

서구적 식민지지배라는 세계적 메모리를 수용하는 의미에서 일본의 서구 동화의 문제이고, 이를 다시 식민지에 적용하면서 생긴 피식민자의 동화와 이화의 딜레마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에 대한 일본의 입장이나 일본에 대한 피식민지인의 입장은 동형적(同型的)인 것으로, 이것이 바로 ‘생활식민지’라는 것이다. 식민자도 피식민자도 동시에 식민지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그것은 자유의 상실이고 동시에 의미에의 구속이었다. 

이러한 문제는 서구적 식민지지배가 동아시아에서 파생된 제국주의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서구적 제국주의의 보편성이 허구였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적 식민지지배 논리 또한 고정되고 보편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역으로서의 서구’를 인지하게 되는데 이는 일본 제국이 쫓았던 서구 제국주의 흉내는 결국 일본제국으로 화살이 돌아와 자신들 식민자의 소외 현상으로 나타났다. 인식의 기준이 타자인 서구에 맞추어졌지만 자신들은 서구가 아니었고, 그 시선만 흉내냈기 때문에 자아를 상대화하는 ‘주체성’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내부 갇힘’으로서의  소외현상이다. 일

본은 제국을 지키기 위해 피식민지를 강제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하는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그리하여 일본인을 기준에 두고 협력적인 일본인으로서 비주체적인 일본인으로의 포섭과 배제를 동시에 작동시킨다. 일본어를 사용하는 것을 통해 정신적 지배가 가능하다고 보았고, 천황주의에 기준을 둔 히에라르키적 권력 구조가 지배의 수단으로서 가능하다고 믿었다. 식민지지배가 실효적으로 ‘실행된다’고 오인하게 되고 현실이라고 인지하게 된다. 그렇지만, 실체 속에서 나타나는 일본인과 비일본인의 경계의 질적 차이는 매워지지 않는데, 그 차이는 차이로서 파악되지 않고 배제의 논리로 재현된다. 그러면서도 그 정치적 언어가 가진 폭력성이나 동화 이해의 척도가 잘못된 것임을 알지 못하고, ‘폭력성’을 강화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이 폭력적 지배의 논리가 교육과 동화 일본인화로의 포섭 형태로 ‘일본인화’가 균질성을 띠게 된다. 그것을 통해서 오키나와・아이누・타이완・조선을 보게 되고, 그것이 ‘세계적 세계관’이라고 믿고 동화와 균질성 ‘필터로만’ 보게 된다. 이러한 필터는 권력 이론으로 재현되고, 포섭과 배제의 논리가 생성되고 진행되었다. 바로 이 개념은 본 역서를 읽는데 근원적 개념이고 이는 식민지지배의 원리를 이해하게 해 준다.  

오구마 에이지의 논리에 의하면 일본 제국주의는 하나의 대표적 ‘생활식민지’의 대표적 사례이다. 지배는 실은 깊은 곳에서 착취와 불평등을 은폐하면서 성립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 제국은 ‘일상’을 파괴하는 형태로 일본제국을 성립시켰고, 그것이 폭력적이라는 감추었다. 왜냐하면 합리화와 문명화라는 논리로 뒤덮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합리화되는 근대화 과정이라고 인식했다. 서구적 근대의 논리를 대입하면서 피식민지가 부품이라고 여기면서, 착취와 억압을 상태화(常態化)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시에 일본은 서구의 부품이라는 역설을 전제하지 못했다. 바로 이것이 ‘생활식민지’ 지배란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즉 생활식민지란 세계적 세계관을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실체적 상징으로 믿게 되면서, 생활 세계 자체가 그것에 종속되는 것을 말한다. 권력의 상황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나 정책이 결국 인식의 내면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면을 권력적으로 지배해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조감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곧 탈식민주의이기도 하다. 공동체와 자신의 관계, 일상적 내면에 들어온 권력의 문제, 이 문제를 묻지 않으면 우월적 타자 흉내내기에 바쁜 비주체적 자아가 되고, 그것은 결국 자기 소외를 불러일으켜 권력을 추종하는 동화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제국주의→식민지지배→생활식민지 지배의 탈바꿈 프로세스이다. 


③ ‘지속되는 제국주의’의 매체로서 ‘포섭과 배제’

일본 제국주의는 생활식민지에 대한 권력의 효용 장치로서 제도, 정책이라는 시스템을 동원했다. 시스템이란 생활 세계를 제국주의에 적용시키려는 행위를 가리킨다. 본 역서에서는 그것이 신화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화성을 의심하는 것, 그것이 형성되는 프로세스를 보여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것이 자유의 박탈로 나타나고 개개인의 평등적 요구를 착취하는 논리 형성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반복하지만 이때  중요한 것은 동화의 문제이다. 제국주의 즉 서구라는 제국주의도 그것을 모방한 일본제국주의도 하나의 세계관을 시스템화 했고, 인식의 세계를 제한하면서 실현된 것이다. 인식이 침식될 뿐만 아니라 국가권력은 적용시켜 포섭해 가는 프로세스, 생활세계를 새로 짠 것임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첫째 제국주의에 의해 평등이나 주권의 권리 획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식민주의에 빠진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규정된 선험성을 갖는다는 논리라고 깨닫지 못하는 것의 식민지화된 인식이며 이때 형성된 것이 확정적 주체이다. 의식이 의식하지 못하는 다른 세계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의 주체로 확정되어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주체를 획득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주체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체없는 주체화 과정’이다. 이는 서구적, 근대적 주체의 설정이 갖는 문제를 여실히 보여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서구제국주의와 일본 제국주의가 보여준 주체의 문제를 재고하게 해준다. 이는 비유적인 사용이며 설득적이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은 다시 독자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디를 더 덧붙이자면, 이는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라 단편화의 문제를 통해 다시 풀어낼 수 있다. 제국주의의 논리는 이질적 세계관을 가진 피식민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일본은 이를 이용하여 유토피아로서 유색의 제국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렇지만 일본은 일본 내의 마이너리티 재생산과 철저한 지배의 개입을 통해 이를 실행하고자 했다. 

일본은 전후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국민국가를 구축하기 위해 전문화, 합리화, 의사결정의 균질화를 내걸고 민주주의를 외쳤다. 이것이 바로 전전에 시행했던 제국주의적 정치적 언어의 다른 표현으로서의 생활식민지 지배였다. 지배자의 편향적 논리라는 점을 은폐시키고, 이를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인식의 봉쇄라는 의미에서 두 개의 포섭인 것이다. 은폐와 은폐를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포섭을 통해 다시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이에 차이를 갖는 비일본인을 재생산하면서 배제하는 이중성을 갖게 된다. 결국 이것을 인지하려는 인식을 소거시켜 버리는 포섭의 방식이 무엇이었는가를 포섭과 배제 이론은 그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교육이나 법률이나 관료의 지배에 의한 제도에 의해 잉태된 일상임을 국민국가의 권력적 지배라는 것이라는 점을 구분해 내지 못하는 ‘인식’에 빠진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 준다. 국가 권력의 설득으로서 제도나 정책이 아니라 이는 폭력적 지배의 다른 방식일 뿐이다. 결과적으로는 인식론 세계의 박탈이며 자유의 수탈인 것이다. 

따라서 본 역서에서는 두 개의 포섭의 방식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생활식민지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금도 역사화의 과정에서 축적되고 있는 문제로서 진행중임으로 알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것은 일본인의 경계 문제를 통해 설명하고자 했는데, 이 문맥을 한국인의 경계로 중첩시켜 보면 ‘한국인’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되돌아가게 되고, 동시에 한국인으로서 포섭되고 배제되는 논리가 무엇인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역설적으로 이를 의식하지 못하면 식민지지배의 문제는 끝나지 않은 것이며 탈식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인의 경계를 식민지주의 문제로 묻고 한국인의 경계 또한 이 문제로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탈식민주의의 질적인 이론을 재정의하면서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포섭의 의미와 배제의 논리를 재고하는 시각, 동화와 무의식을 인식하는 ‘세계관’을 갖는 것이 주체성을 되찾는 과정인 것이다. 이 세계관, 즉 동아시아 평화 문제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평화 담론 속에 내재된 포섭과 배제라는 히에라르키의 구조를 재고하고 그 내부에서 다시 헤게모니가 재편되는 프로세스를 통해 인식의 봉쇄가 반복되지 않는 논리를 제시해 가는 것이 그 시작임을 깨닫게 해 준다. 

 

 

 

 

전성곤
한림대 일본학연구소 HK교수.

『내적 오리엔탈리즘 그 비판적 검토: 근대 일본의 식민 담론들』 등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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