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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문화 2023년 가을호 (통권120호)
황해문화 2023년 가을호 (통권120호)
  • 김재호
  • 승인 2023.08.23 17: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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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얼문화재단 | 504쪽

다중재난 시대에 정의로운 전환을 모색하며 

- 계간 『황해문화』 발간 30주년 특집호 

『황해문화』가 첫발을 내디딘 1993년은 전 지구적으로, 그리고 국내적으로 격변의 시기였다. 당시는 100년 넘게 세계를 분할해온 주요 세력 중 하나였던 사회주의체제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던 때였다.

또한 당시는 민주화 이행의 기쁨이 민주화운동 내부의 분열과 패퇴, 수구 보수 세력의 연이은 집권에 따른 좌절감으로 퇴색하던 시기였다.

이런 가운데 탈냉전으로 표현되는 새로운 세계 문명의 창도는 인천을 비롯한 각 지역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통찰이 지난 30여 년 동안 『황해문화』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꿋꿋하게 전진해올 수 있었던 길잡이였다. 

2006년 50호를 발간하면서 『황해문화』는 “이제 성장도 정리도 끝난 포스트모던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세간의 시대 인식에 거슬러, 우리에게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근원적 난제들을 인식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음을 명시한 바 있다.

그것은 시대적인 혼돈의 와중에 섣부른 판단과 명령을 내리기보다 그 혼돈의 상황을 직시하고 그 속에 담긴 “불행과 고통과 갈등과 비명”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무라는 『황해문화』의 자세였다. 

2018년 100호를 발간하면서 『황해문화』는 “통일과 평화 사이”에서 ‘황해’의 위상에 대해 질문한 바 있다. 이 질문은 지난 70여 년 동안 한국 사회를 질곡에 빠뜨려온 분단과 전쟁의 엄중함을 기억하면서도 섣부른 통일과 평화에 대한 기대를 경계하기 위함이었으며, 진정한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그 주체와 장소, 방법에 관해 더 깊이 숙고해야 함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황해라고 하는 ‘주체’, 곧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지난 근현대를 살아온 주변부의 작은 지역의 시민들이, 황해라고 하는 ‘장소’, 곧 분단과 냉전의 경계이면서 동시에 섬과 섬, 항구와 항구, 지역과 지역을 잇는 그리하여 하나의 세계와 다른 세계가 교류하고 어울리는 곳에서, 황해라고 하는 ‘방법’, 곧 중앙집권적이지 않은 자율적인 변방성, 폐쇄적이지 않은 개방성, 선형적이지 않은 횡단성을 바탕으로 대안적인 통일-평화의 기획을 모색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선언이었다. 

이제 『황해문화』는 이전의 성과의 무게를 실감하면서, 비상한 마음가짐으로 ‘전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자’는 창간사의 다짐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확인하면서도 오늘날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볼 때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함을 새삼 절실히 깨닫는다.

그것은 이제 너무 익숙해진 위기라는 말로도 제대로 형용하기 어려운, 절박하고 다중적인 재난의 먹구름이 현재와 미래의 세계를 뒤덮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황해문화』 120호는 이런 측면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기 위한 발판을 놓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다중재난’ 그리고 ‘정의로운 전환’이란 무엇인가?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복합위기’라는 말을 자주 거론한다. 2022년 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에너지와 농산물 가격이 폭등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이에 따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급격하게 금리를 인상하면서 각국 중앙은행도 연쇄적인 금리 인상 대열에 합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 가능성이 높아졌으며, 여기에 더해 환율 인상, 금융 불안정, 부동산 가격 하락, 가계부채 문제 같은 다면적인 위험 요인들이 누적되고 있다는 것이 이른바 ‘복합위기’론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복합위기’로 표현되는 이 문제들이 한국 경제와 사회에 적지 않은 부담과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은 ‘치안police’의 관점에서 이해된 위기일 뿐이다. 치안에게는 기존 지배 질서의 안정적인 재생산과 지배 계급의 이익 보장이 최고의 목표이기 때문에, 이를 위협하는 요인들은 모두 무차별적으로 위기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치안에게는 인플레이션이나 금융 불안정도 위기지만 민주화 시위도 위기고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도 위기다. 지배 계급과 정권은 기존의 질서를 ‘정상적인’ 것으로 규범화하고, 이 질서를 훼손하거나 동요시키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탄압하거나 배제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려고 한다. 

치안이 위기라고 부르는 것들이 많은 경우 도리어 진정한 위기들을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언론과 정치권에서 ‘복합위기’라고 부르는 것에는 ‘인류세’ 내지 ‘자본세’라는 명칭으로 표현되는 생태적 재난이나 3년여의 시간 동안 진행되어온 코로나 팬데믹 같은 보건 재난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서로 맞물려 있는 이러한 생태적·보건적 재난은 인류 문명의 토대 자체를 잠식하는 문명적 위기이며 민중의 삶에 심각한 피해를 낳지만, 복합위기론에서 이 문제는 방치되거나 배제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은 이미 지나간 사건으로 치부되고 있으며, 기후위기는 기만적인 ‘탄소중립 녹색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자본 축적의 구실로 전락하고 있다.

또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래 전 지구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사회적 불평등이나 세월호 참사 및 이태원 참사로 대표되는 사회적 재난들과 더불어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과 성적 소수자, 장애인, 이주자, 탈북민, 난민 등 사회적 약소자들이 직장, 일상에서 직면하는 불안전 재난도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여성가족부 해체’나 ‘노동조합 회계 감사’ 또는 ‘관제 애도’ 같은 에피소드에서 보듯 현 정권은 약소자들을 탄압하거나 배제하는 데 골몰하고 있을 뿐이다. 그 사이에 하루가 멀다 하고 일터에서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전 세계적인 지정학적 변동과 그것이 특히 동아시아의 정세에 미칠 파장 역시 제대로 고려되지 못하고 있다.

대개 ‘신냉전’으로 명명되는 이러한 재편은 군사적·정치적·경제적 질서의 전환 흐름 속에서 동아시아에서는 한미일 대 북중러 대결 구도로 가시화되고 있는데, 현 정권이 시대착오적인 냉전 반공주의에 불과한 ‘가치 동맹’의 기치 아래 전개하는 외교·안보 정책은 이러한 대결을 조장·강화하고 있어서 군사적 긴장만이 아니라 정치적·경제적 불안정을 심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전망은 점차 멀어지고, 적대적인 대결 구도가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하고, 이는 다시 민중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악순환의 경로가 고착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이러한 재난들의 중심에는, 낸시 프레이저가 말하듯 ‘식인 자본주의’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닌지 질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오늘날의 식인 자본주의는 착취에 기반을 둔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할 뿐만 아니라 ‘제국적 생활 양식’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되는, 글로벌 남반구와 북반구 사이의 인종적 수탈 및 구조적 불평등의 간극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는 자연 생태계의 파괴를 산출함으로써 문명의 기초를 잠식하고, 인공지능 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에 입각하여 대중의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을 이용함으로써 오히려 대중의 사고와 감정, 행동에 대한 정밀한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에서 주목해야 하는 진정한 위기는 치안이 명명하는 ‘복합위기’가 아니라 그것이 은폐하고 배제하는 다중적 재난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이러한 재난들이 누구에게나 명백하게 드러나는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사실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들을 서로 연결된 다중적 재난들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것들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겪어야 하는 민중들, 곧 을(乙)들의 관점에서 문제를 이해하고 사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지배 세력이 ‘복합위기’나 ‘탄소중립 녹색성장’ 같은 기만적인 프레임을 통해 다중재난의 현실을 직시하는 대신 그것을 오히려 새로운 이윤 획득의 기회로 삼고자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대안적 프레임의 개발을 비롯한 인식론적 투쟁이 수반되어야 하는 과제다. 

우리가 ‘다중재난’과 더불어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또 다른 핵심어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의로운 전환은, 다중재난을 몸으로 겪으면서 그것에 맞서는 민중의 관점에서 이러한 재난들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진보적으로 전환하기 위한 다중적이고 다면적인 노력의 방향을 지칭하는 포괄적인 명칭이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 우리는 먼저 돌봄에 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돌봄은 흔히 생각하듯이 어린아이나 노인 또는 환자나 장애인에게만 필요한 서비스 활동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 활동이며 더 나아가 자연 생태계의 약탈적인 파괴를 저지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활동이다.

우리들이 각자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서 사회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며, 또한 다른 누군가의 삶을 지속적으로 돌봐야 한다.

그것이 생태적·사회적 연관망 속에 존재하는 관계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성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과 다른 누군가의 삶을 돌보고 돌봄을 받는 것은 모든 시민의 의무이자 각자가 누려야 할 권리이며 필수적인 삶의 조건이다. 

자연과 인간, 주체와 객체, 생명과 비생명, 공공성과 사유성, 국민 대 비국민, 남성과 여성, 정상인 대 비정상인 등 대립적이고 경쟁적인 범주들에 의거하여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자본주의 문명을 전환하기 위해 돌봄 개념은 우리에게 어떤 길을 제시해줄 수 있을까? 생태적·보건적 재난과 불안전 재난, ‘신냉전’의 전개, 디지털 자본주의의 심화는 사회의 공동 이익 및 인류의 공동 생존을 추구해야 할 집합적인 정치적 주체를 해체하여 그들을 서로 상이한 이익 추구를 위해 끝없이 경쟁하는 신자유주의적인 행위자들로 변모시키고 있다.

더욱이 트럼프 시기의 미국에서, 러시아와 동유럽, 중남미에서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부상하고 있는 신권위주의 통치는 강자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을들 간의 적대적 갈등을 조장하는 포퓰리즘 정치를 활용하여 약소자 시민들의 권리를 짓밟고 외면함으로써 민주주의 공동체의 기초를 파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을들 간의, 민중 간의 새로운 연대가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모든 문제는 결국 자본주의로 귀착된다는 본질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러한 질문들을 자본주의에 관한 질문과 연결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해체된 이후 자본주의는 유일하게 가능한 현실적 사회경제체제로 존립해왔고 정당화되어왔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재난이 직·간접적으로 자본주의의 비이성적인 광기와 연결되어 있다면, 정의로운 전환의 시도는 자본주의 이후라는 문제, 자본주의를 넘어서라는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이전의 사회주의의 시도가 실패로 귀결된 이후,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들을 어떻게 사고하고 실천해볼 수 있을까? 어떻게 지금까지 제시되었던 자본주의의 대안들에 대한 새로운 대안들을 모색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계 문명을 구성할 수 있는 길을 우리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다른 세계들과 정의로운 전환 

『황해문화』 120호 특집은 통권 120호 발간기념 심포지엄 <정의로운 전환을 위하여 - 다중재난 시대의 새로운 길 찾기>의 결과물을 바탕으로 ‘다중재난’과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두 개의 핵심어를 통해 다중재난의 구체적인 양상과 문제, 그리고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대안을 밝히는 원고들로 구성되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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