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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57] 진리로 포장한 거짓말을 저지른다면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57] 진리로 포장한 거짓말을 저지른다면
  • 조준태
  • 승인 2023.09.04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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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적으로 무력 억압에 의존하는 경향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국제 문제에서도 ‘내 마음대로 하겠다’라는 오만한 자세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이나 전두환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나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등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1950년대 냉전이 시작될 때 스톤이 했던 말이다.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라는 말도 그가 베트남전쟁 때 했던 말이다. 스톤은 작가나 저술가라는 직명과 함께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미국의 탐사 기자’로 소개된다. 정부나 기업 등이 제공하는 자료에 의존하지 않고, 학구적이라고 할 정도로 치밀하고 철저한 조사로 중대한 공적 문제를 파헤쳐 숨겨진 진실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그는 시민의 인권을 지키는 탐사 기자로 평생을 살았다.

스톤을 ‘프리 저널리스트’라고도 하는데 우리말로는 ‘자유 기자’라기보다 ‘독립 기자’라고 번역하는 편이 더 적절하겠다. 유튜브가 생긴 뒤 1인 언론이 유행했는데, 그 시초는 스톤이 자비를 들여 1953년부터 18년간 홀로 간행한 〈주간 스톤〉일 수 있겠다. 

1972년 스톤의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뉴욕대 언론학부는 〈주간 스톤〉을 20세기 미국의 100대 사건 가운데 16위에 올렸고, 신문 중에서는 2위로 평가하며 스톤을 최고 언론인으로 꼽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권력과 거리를 둔 영원한 아웃사이더였다. 권력에 가까운 인사이더였던 월터 리프먼 등의 전형적인 언론인과는 상극이었다. “장관이 당신을 점심 자리에 불러 이런저런 의견을 물어보면 당신은 이미 끝장이다.” 스톤의 말이다.

이지도어 파인스타인 스톤은 가난한 유대계 러시아 이민자의 후손으로 1907년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여든두 살이 된 1989년에 역시 가난하게 죽었다. 언론인의 천분은 열네 살 때 네 쪽짜리 동네 신문 〈진보〉를 만들어 간디의 인도 독립 투쟁과 윌슨의 평화주의를 지지했을 때부터 보였다.

 

“장관이 불러 의견을 물으면 이미 끝장이다”

10대였던 스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아나키스트 언론인이자 작가인 크로폿킨이었다. 그는 고향 부근의 시골인 해든필드의 고등학교를 52명 중 49등으로 졸업했다. 하지만 1학년 때부터 지역신문의 통신원을 지냈을 정도로 타고난 언론인이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다가 중퇴하고 공화당 계열인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의 기자가 되었다. 곧 민주당 계열의 〈필라델피아 레코더〉로 옮겼고, 다시 일간지 〈뉴욕 포스트〉로 옮겼다. 스물다섯 살 때 〈뉴욕 포스트〉의 논설위원으로 히틀러를 비판한 것도 타고난 언론인 기질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리프먼을 비롯해 어떤 언론인도 아직 히틀러에게 관심이 없었다.

카를 마르크스, 잭 런던, 표트르 크로폿킨 등의 영향으로 스톤은 10대 때 사회당에도 가입했다. 오래지 않아 당파적 분열에 질려 탈당했고,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을 지지했다. 1930년대에는 스탈린이 히틀러와 같다고 비판했고, 레닌과 트로츠키가 로마노프 왕조를 잔인하게 처형했다고 비난했다. 1935년부터 1943년까지 그는 릴리언 헬먼, 더실 해미트, 아서 밀러와 함께 미국작가동맹에서 활동했다.

1937년에 쓴 첫 작품 『법원이 결정권자다(The Court Disposes)』에서는 뉴딜정책을 가로막는 보수적인 사법부를 비판해 새로운 법학과 재판이 시작되도록 했다. 같은 해에 기자를 신문사 경영진에 종속시키려는 태도에 분노해 다니던 신문사를 사직했다. 

『팔레스타인 잠행기(Underground to Palestine)』 초판. 책에서 스톤은 유대인들의 아랍인 차별에 반대했다. 사진=위키피디아

1939년부터는 소련을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그와 함께 미국의 지배층도 비판한 탓에 언제나 자신에게 적대적인 분위기에서 언론 활동을 해야 했다. 1941년에는 『평상시처럼: 방어의 첫해(Business as Usual: The First Year of Defense)』을 써냈다. 책에서 스톤은 전시하에서 벌어지는 산업과 기업에 대한 독점을 비판했다. 이를 용인하는 미군과 연방수사국에 의한 정치적 고용 차별도 함께 문제시했다.

 

소련과 미국의 지배층을 모두 비판하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그는 팔레스타인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조사한 뒤 쓴 『팔레스타인 잠행기(Underground to Palestine)』에서는 유대인과 아랍인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이스라엘 건국을 주장했다. 스톤은 유대인들의 아랍인 차별에도 반대했는데, 이 때문에 ‘반유대주의자’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냉전과 매카시선풍에 따른 인권의 제한을 비판한 그는 1952년에 『비사 한국전쟁, 1950~1951(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1950–1951)』을 펴냈다. 책에서 스톤은 미국의 정책하에 남한이 38선에서 게릴라 공격을 계속해 북한을 자극했고 전쟁을 시작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공식 보도와 언론인들의 보도 사이 괴리를 발견하고 그 틈새를 집요하게 파고든 이 책은, 소위 남침 유도론의 효시였다. 이 책은 미국에서 출판과 판매가 금지됐다.

38선에서의 잦은 교전이 확대돼 전쟁으로 발전했다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스톤의 견해를 발전시킨 것이었다. 냉전 붕괴 후 옛 소련 자료의 공개로 남침 유도론은 유효성을 잃었지만, 당시 자료의 한계 속에서 이룬 연구의 독창성만은 평가할 만하다.

한국전쟁과 남침 유도론을 다룬 스톤의 책. 당시 미국에서 출판과 판매가 금지됐다. 사진=Open Road Media

스톤은 이후 미국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연방수사국의 감시를 받았다.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던 그는 1953년부터 1인 신문인 〈주간 스톤〉을 창간했다. 친구에게 빌린 3천 달러와 도산한 한 좌파 매체의 구독자 명단 5천여 명을 바탕으로, 취재, 집필, 편집, 발행, 배포를 모두 혼자서 했다. 광고를 싣지 않는 겨우 네 쪽짜리 신문을 구독료만으로 20년 가까이 버텨냈다. 

“억압받는 자들에게 약간의 위안이라도 주기 위해, 내가 직접 본 그대로의 진실을 쓰기 위해, 나 자신의 무능력이라는 한계를 빼놓고는 그 밖의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의 충동을 빼놓고는 그 어떤 주인도 따르지 않을 자유를 누리기 위해, 언론인이란 진정으로 어떠해야 하는지라는 나 자신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그리고 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이 밖에 바랄 것이 또 뭐가 있겠는가?”라고 당시 스톤은 썼다.

 

“내가 직접 본 그대로의 진실을 쓰기 위해”

1950년대부터 스톤은 소련의 간첩으로 몰리는 등 색깔론 공격을 받았다. 1964년에는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베트남전을 시작한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도전한 유일한 언론인으로서 베트남 반전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닦았다. 1965년 4천 부를 기록한 〈주간 스톤〉은 1960년대 말 7만 부까지 발행됐다.

협심증으로 1971년 주간지의 간행을 중단한 스톤은 펜실베이니아대학으로 돌아가 고대 그리스어로 학사 학위를 받고 『소크라테스의 비밀』을 썼다. 그 책에서 스톤은 아테네인들이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은 실수지만, 그런 선고를 당할 만큼 소크라테스는 반민주적이었으며 개방사회의 적이었다고 주장했다. 

1964년 린든 존슨의 모습. 그는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전을 시작했다. 사진=위키피디아

이러한 견해는 책이 나온 1988년은 물론 지금까지도 인류의 성인으로 받들어지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새로운 견해로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국에서 그의 견해를 참조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역사가란 모름지기 ‘역사 탐사 기자’여야 한다는 말이 있다. 스톤이야말로 프란츠 카프카가 말했듯 도끼로 인류의 머리를 찍는 참된 작가이자 저자였다.

랠프 네이더는 “스톤은 독립적이며 부패에 물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대의 토머스 페인이었다”며 “시력과 청력이 나빴지만 그는 다른 어떤 언론인보다 더 많이 보고 들었다. 충만한 호기심으로 매일매일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불의에 분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네편 내편을 가르는 진영논리 아래 있지 않았다. 불의와 불평등, 진리로 포장한 거짓말을 저지르는 그 누구라도 포착하고 비판했다. 그래서 동지가 적이 되는 경우도 흔했다. 거만하면서 속은 유치한 전문가들을 혐오했고, 그들과 달리 도발적이면서도 경쾌한 문장을 구사했다. 언제나 남들이 비겁하게 침묵할 때 ‘홀로 용감하게’ 외쳤다. 기자들이 정부나 기업의 발표를 앵무새처럼 그대로 옮겨 쓰레기를 양산하느라 바쁠 때, 그는 평생의 독학으로 다진 철학과 사상을 토대로 진실을 추구하는 비판적인 글을 썼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했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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