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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53] 추악함 속에서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희망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53] 추악함 속에서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희망
  • 조준태
  • 승인 2023.08.11 14: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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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4일, 대법원은 과거 통합진보당 행사에서 ‘혁명동지가’를 불렀다는 혐의 등으로 기소된 3명의 당원에 대해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의 반국가단체 등의 활동을 찬양·동조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확정했다. 아직도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반국가 범죄자가 되는 세상에 여전히 살고 있고, 저 지독히 어두웠던 세월에서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여실히 깨닫는다. 

‘혁명동지가’보다 더 유명한 논란의 노래인 ‘임을 위한 행진곡’을 현 대통령이 5·18 기념식에서 불러 화제가 돼 이제는 적어도 더 이상 노래 시비는 없을 줄 알았는데, 그 대통령이 지난 정부를 반국가세력이라고 하니 다시 ‘반국가 범죄자’들이 나올지 두렵다.

1991년에 읽은 『잣대는 사랑』은 1933년 노동절에 뉴욕 유니언 광장에 모인 5만 명이 공산주의 찬가를 부르는 장면을 묘사하며 시작한다. 그곳에서 신문 〈가톨릭 노동자〉의 창간호가 무료로 배포됐다. 당시 가톨릭은 반공의 선봉에 섰기에 사람들 대부분은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것을 읽은 소수는 가톨릭에도 양심적인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양심적인 가톨릭 사람은 창간호 사설에서 예수와 사도도 홈리스임을 알아 위안을 받는다며, 셋방 부엌과 지하철역에서 집필되고 편집되는 이 신문은 종사자에게 월급을 주지 않는다고 썼다. 그 종사자는 오직 한 사람, 자식을 키우는 가난한 이혼 여성 도러시 데이였다. 

19세의 도러시 데이. 사진=위키피디아

데이는 1980년 죽을 때까지 셋방 부엌과 지하철역과 마찬가지인 가난한 공간에서 그 신문의 편집인으로서 글을 쓰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참된 ‘무소유자’로 살았다. 그는 노동자와 빈민을 위해 “평생 평화적이지만 혁명적인 변화를 위한 운동가”로 살았다. 

도러시 데이는 1897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보수적인 언론인 아버지와 부친과 같은 길을 간 두 오빠 밑에서 자랐다. 하지만 톨스토이와 크로폿킨, 그리고 옘마 골드만을 비롯한 아나키스트의 책을 읽었고, 자기 방식으로 살고자 2년 만에 대학을 그만뒀으며, 급진 사회운동에 투신했다. 

 

‘반공’ 가톨릭이면서 노동자 편에 선 도러시 데이

데이는 그 뒤 몇 차례 투옥됐고, 좌파 기자 노릇을 하며 마음껏 사랑했으며, ‘낙태’했고 결혼했으며 딸도 낳았다. 그러다 문득 ‘오랜 외로움’을 느껴 가톨릭에 귀의하면서 이혼했다. ‘오랜 외로움’은 그가 1952년에 낸 자서전의 제목으로, 그의 회심을 상징한다. 책은 2010년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말로 번역됐다.

20세가 된 1917년에 여성 참정권 운동으로 투옥되기도 한 데이는 1920년대 말 대공황으로 거리에 넘쳐나게 된 홈리스를 위해 살기로 결심하면서 〈가톨릭 노동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피터 모린과 함께 ‘환대의 집’을 열어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폈고 홈리스를 위한 비폭력 직접 행동을 결합한 평화주의 운동인 ‘가톨릭 노동자 운동’을 설립했다. 

스페인 내전 때는 가톨릭의 방침과 달리 프랑코와 싸운 인민전선을 옹호했다. 1941년 일본에 대한 미국의 선전포고 이후에는 평화주의를 재확인하고 전쟁에 대한 비협조를 촉구했으며,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지지했다.

데이는 1951년 냉전이 막 시작될 무렵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에 대해 “비록 그들의 목적이 권력 쟁취를 의미하고, 강력한 군대의 건설, 강제수용소와 강제노동, 고문과 학살을 초래했다고 믿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혁명은 형제애로 활기를 띠었다”라고 썼다. 

도러시 데이가 창간한 〈가톨릭 노동자〉. 사진=The Catholic Worker Movement

그는 “모든 인간은 형제”라는 가톨릭의 믿음에 따라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의 인간성을 찾았고, 그들을 예로 든 것이었다. 가톨릭 지도자들과의 투쟁도 계속돼 결국 1951년 뉴욕 대교구는 데이에게 출판을 중지하거나 그의 출판물 이름에서 가톨릭이라는 단어를 삭제하라고 명령했다.

1955년에는 민방위훈련 참가를 거부하는 평화주의자들과 함께했다. 데이는 그 거부에 대한 처벌이 위헌이라고 주장한 사람들과 달리, 그것이 법이 아니라 철학의 문제, 즉 미국이 원자폭탄을 처음 사용한 것에 대해 ‘공적인 참회’라고 말했다. 훈련 거부자들은 유죄를 인정했으나 판사는 그들을 순교자로 만들지 않겠다고 하며 그들을 감옥에 보내지 않았다. 

 

아나키스트에게서 보이는 그리스도의 정신

그 후 데이는 5년간 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1958년에는 피신하는 대신 단체에 가입해 미국 원자력위원회 사무실 앞에서 피켓시위를 했다. 1960년에는 피델 카스트로의 ‘사회정의의 약속’을 찬양했다. 

“가난한 빈곤층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폭력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훨씬 낫다”라고 말한 데이는 몇 달 후 쿠바를 여행했다. 그는 1960년대에 히피라고 불렸지만, 당시의 히피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중산층 풍요의 자기 방종, 즉 ‘고난을 알지 못하고 원칙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라고 비판했다. 

데이는 미국의 베트남전쟁을 문명 수호 전쟁이라고 옹호한 가톨릭 지도자들과 달리 베트남전쟁에 비판적이었고 호찌민을 “비전 있는 사람, 애국자, 외국 침략자에 대한 저항자”라고 찬양했다. 동시에 그는 소련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힌 솔제니친을 옹호했다.

1972년 예수회는 데이의 75세 생일을 맞아 지난 40년 동안 미국 가톨릭 공동체의 열망과 행동을 최고로 상징하는 사람이 그라고 찬양했다. 그러나 데이의 사상은 아나키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데이는 아나키스트들이 “자기와 같이 경찰서와 감금 장소, 유치장, 교도소 등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연방소득세 납부를 거부하고 투표한 적이 없기” 때문에 운동의 가치를 공유한다고 인정했다. 아나키스트들은 그의 “단일한 권위주의적 신앙”에 대해 의문을 가졌지만 말이다.

반면 데이는 “비록 그들은 그리스도를 부정하지만, 도리어 그들에게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세상의 비참한 사람들을 위해, 더 나은 사회질서를 위해 일하는 것에 자신을 바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데이의 분배주의적 경제관은 그가 영향을 받은 프루동의 상호주의 경제 이론과 매우 유사했다.

 

“우리 모두 조금씩 더 가난해지도록 노력합시다”

1970년대 초 노동야학에서 오스트리아 신부에게 도러시 데이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는 부정적인 인상을 받았다. 당시 신부는 데이가 노동운동을 한답시고 가톨릭 신자이면서 낙태를 했고, 많은 남자와 사랑을 했으며 조국을 사랑하지 않은 아나키스트라고 말했다. 당시 노동자 남녀나 위장취업자의 혼숙 문제도 비판했다. 노동 사목이었던 신부가 그렇게 말할 정도였으니 당시 가톨릭은 데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은 듯하다. 

평화시위를 벌이는 데이를 묘사한 스테인드글라스. 사진=The Catholic Worker Movement

그러나 2015년 9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의회의 합동회의에서 연설하면서 에이브러햄 링컨, 마틴 루서 킹 주니어, 토머스 머튼과 함께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는’ 4명의 모범적인 미국인으로 데이를 언급했다. “그의 사회적 행동주의, 정의에 대한 열정,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열정은 복음서와 신앙, 성도들의 본보기에서 영감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짐 포리스트가 쓴 『잣대는 사랑』과 로버트 콜스가 쓴 『환대하는 삶』 등에서 도러시 데이를 평하지만 최고의 평전은 도러시 데이의 손녀 케이트 헤너시가 2017년에 출간한 『도러시 데이: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Dorothy Day: The World Will Be Saved by Beauty)』이다. 

그 책의 부제인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백치』에 나오는 말이다. 그 아름다움이란 절망의 시대를 구원할 정신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데이의 손녀도 그렇게 할머니를 회상했을 것이다. 나에게 데이는 정신의 아름다움을 넘어 그저 아름다운 여인, 사랑스러운 여인이다. 추악한 세상을 구원하지는 못할지언정 아직도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가톨릭은 그를 성녀로 지정하겠다고 한다. 나에게 그는 그냥 아름다운 사람으로 충분하다. 1978년 세계성체대회에서 한 말 때문이다. “우리 모두 조금씩 더 가난해지도록 노력합시다. 제 어머니께서는 ‘모든 사람이 조금씩만 덜 가지면 한 사람 몫이 나온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우리 식탁에는 언제나 한 사람 몫의 자리가 더 있습니다.” 1980년, 단 한 평의 주거 공간이나 재산도 소유하지 않고 떠나면서 그가 남긴 묘비명은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였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했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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