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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대량 생산’ 민낯 드러낸 ‘한국에서 연구하기’
‘부실·대량 생산’ 민낯 드러낸 ‘한국에서 연구하기’
  • 조준태
  • 승인 2023.07.14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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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공유연대, ‘한국에서 연구하기’ 연례 심포지엄 열어

한국에서 영어 논문 쓰기, 부실 학술지에 투고하기 등 학계의 내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심포지엄이 열렸다. 지식공유연대는 14일 서울 마포에 있는 연구자의 집 R커먼즈 합정에서 ‘한국에서 연구하기’를 주제로 2023 연례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번 심포지엄은 국내 신진 연구자들의 좌담집 『한국에서 박사하기』의 문제의식을 확장했다. 신진 연구자의 ‘박사하기’를 넘어 학술 생산·유통 구조 현실에서 ‘한국에서 연구하기’를 솔직하게 진단하는 자리였다.

지식공유연대는 14일 '한국에서 연구하기' 심포지엄을 열었다. 사진=줌 화면 캡쳐

카이스트 디지털인문사회과학센터의 김병준 박사는 지난해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 실태점검 결과, 등재 취소가 결정된 A학술지의 논문 게재 실태를 정량 분석해 부실 학술지의 문제를 비판했다.

2022년 기준 인문사회 학술지는 연평균 30건 이하의 논문을 출판한다. 등재 취소에 이른 A학술지의 지난 한 해 출판 건수는 1천500여 편. A학술지는 10매 이상의 분량에 추가 게재료를 부과해 짧은 분량의 논문을 유도했다. 그 결과 게재 학술지의 평균 분량은 13.7매를 기록했는데, 인문사회과학 논문 기준으로는 상당히 짧은 편이다. 길이를 줄이기 위해 참고문헌 수도 적게 제시했다. ‘논문 공장화’의 한 양상이었다.

김병준 박사는 ‘반복 투고’도 지적했다. A학술지가 학회의 관례를 어기고 편집위원을 포함한 투고자들에게 동일 호 복수 게재, 세 번 이상의 연속 게재를 허락했다는 것이다. 기준이 엄격한 학술지들은 편집위원의 투고와 동일 연구자의 반복·연속 게재를 제한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부실’, ‘대량 출판’ 학술지 간 공생관계도 문제였다. A학술지와 또 다른 ‘대량 출판’ 학술지의 논문 저자들은 서로를 인용하며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A학술지 논문이 많이 인용한 대량 출판 학술지 4종은 최근 1~2년 사이 한국연구재단으로부터 등재 탈락 판정을 받았다. ‘닫힌 인용 네트워크’를 규제한 것이라고 김 박사는 전했다.

사진=심포지엄 줌(ZOOM) 공유 화면 캡쳐

 

사진=심포지엄 줌(ZOOM) 공유 화면 캡쳐

문제는 A학술지와 같은 부실 학술지가 더 존재하고 앞으로도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제도의 결함과 한국 학계의 구조적 문제로부터 불거진 부실 학술지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김 박사는 대안으로 한국 연구재단 등재지라 안심하지 말고 투고를 장려하거나 전문 분야가 뚜렷하지 않으면 의심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고찬미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전문위원은 국내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이 영어 논문을 쓰는 이유와 그 학문적 효과를 분석했다. 대학에 소속된 연구자들은 SCI급 논문을 게재하면 300만 원에서 1천만 원 사이의 장려금을 받으며 인사고과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대학 서열을 결정하는 ‘국제화’ 지표 때문이다.

국내 학자들은 이를 위해 영어 논문을 ‘대량 생산’하지만 국내·외를 막론하고 거의 읽히지 않고, 인용도 되지 않는다고 고 박사는 지적했다. 이런 논문은 SCI급 논문임에도 해당 분야 국내 학술지 인용 순위는 대부분 하위 10% 이하였다.

국제적 소통과 학술교류를 위해 영어 논문은 필요하다. 하지만 이를 위한 실제적 준비는 국내 학계에 거의 마련돼 있지 않다. 학술용어에 대한 표준적인 표기법조차 준비되지 않았다고 고 박사는 말했다. 학술연구를 외국어로만 진행하는 ‘학문의 식민화’도 문제였다.

고 박사는 ‘영어 논문 쓰기’와 함께 ‘한국어로 학문하기’를 정확히 의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의 영어 논문을 영어 이용자에게 제공하는 오픈 플랫폼 등 적극적인 제도적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김완종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오픈액세스센터 센터장은 ‘오픈액세스 운동’의 효과를 분석해 외국 사례를 중심으로 ‘부실 의심 학술지’ 대응법을 제시했다. 대안으로는 오픈 피어 리뷰와 함께 학술활동에 대한 질적 평가를 강조했다.

『한국에서 박사하기』의 공저자인 이송희(고려대)·유현미(창원대) 박사는 이 책이 불러 일으킨 논쟁을 정리하며, 학계 거버넌스 구조 개편과 연구자 연대를 위한 대안을 제시했다. 대학(원)과 학계, 국가, 사회를 연결하는 다양한 의사소통 경로를 구성하고, 학술 정책과 제도를 형성하는 과정에 적극 참여해 변화를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서현 제주대 박사는 대학 바깥에서 생겨나는 독립적 학술공동체에 주목했다. ‘학술 커먼즈’로 명명한 학술공동체가 긍정적인 학술생태계 구축에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심포지엄의 사회는 천정환 지식공유연대 공동대표가 맡았으며, 종합토론은 박배균 지식공유연대 공동대표가 이끌었다. 이번 심포지엄은 지식공유연대와 지식공유 연구자의 집, 민교협2.0이 주최했다.

조준태 기자 aim@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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