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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속에 그렇게 '文革'은 준비되고 있었다
침묵 속에 그렇게 '文革'은 준비되고 있었다
  • 이중 숭실대 전 총장
  • 승인 2006.09.16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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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중국산책 (15)

등소평을 통하여 모택동의 과오와 말기적 징후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그런데 승리를 거둔 후에 그는 신중하지 못하였고, 만년에 일부 左적인 사상이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만년에 그는 원래의 사상, 원래의 아주 훌륭하고도 정확했던 주장과 사업 작풍들을 포기했다. 이때 그는 실제와 접촉하는 일이 아주 드물었다. 생전의 그는 이전의 양호한 작풍, 이를테면 民主集中制, 군중노선을 제대로 관철하지 못했고, 양호한 제도를 제정하지도 못했다. 이것은 모택동 동지 개인의 결점일 뿐만 아니라 나를 포함한 1세대 노혁명가들도 책임을 져야 한다. 당시 우리 당의 정치상황, 나라의 정치상황이 비정상적이었다. 家父長的 작풍이 번져나가고 개인을 노래하는 일이 많아지는 등 전반 정치상황이 건전하지 못하여 나중에 문화대혁명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중국공산당의 혼란은 등소평의 지적대로 “일부 左적인 사상”에서 기인한다. 인민공사, 反우파 투쟁, 문화대혁명 등등,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국가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던 것이 1966년에서 시작되어 1976년 모택동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린 문화대혁명이었다. 등소평은 “이 때 그는 실제와 접촉하는 일이 아주 드물었다”고 모택동의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라나 당의 정치상황이 비정상이었고, “가부장적 작풍이 번져나가고 개인을 노래하는 일이 많아지는 등” 심상치 않은 말기현상이 일어났었던 당시의 정황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징후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여산회의 이후 彭德懷는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었고, 이것은 한 개인의 불운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이후 중국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 중요한 고비가 되었다. 1956년의 百花齊放, 百家爭鳴 이후엔 지식인과 일반 인민들이 침묵하기 시작했고, 1959년 여산회의 이후엔 공산당원들마저 침묵하게 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당시의 중국은 경색되어 갔다. 사회 전반의 침묵이란 결코 예사로운 징조는 아니다. 중국의 경우, 10년간의 대동란이라 할 문화대혁명이 그 무거운 침묵 속에서 서서히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모택동과 중국을 이야기하다'란 책에서 나는 이 정도로 축약해서 팽덕회 숙청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한 적이 있다.

팽덕회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의 총사령관이었다. 그는 1898년 생으로 劉少奇 周恩來와 동갑이며, 모택동과 같은 호남성 출신이다. 두 사람은 정강산 이래의 동지였다. 정강산혁명열사기념당을 찾으면 그 첫 방에 네 사람의 대형사진이 걸려있다. 모택동, 주덕, 진의와 팽덕회, 모택동은 넥타이를 매지 않은 중산복 차림이고 세 사람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특히 이 기념당은 이 네 사람의 영도 외에도 정강산에서 희생된 수많은 병사들의 사진을 전시하고 있었다. 눈에 뜨이는 몇몇을 수첩에 적었다가 나중에 확인해 보니 주덕의 첫 번째 부인도 있었다. 吳若蘭이라고 했다. 기념당을 나오면 바로 곁에 彫塑園과 碑林이 있고 陵園도 있었다. 모두 짙은 안개 속에 묻혀 있었다. 그만큼 정강산은 험산이고 기후가 좋지 않은 오지의 산이었다.

모택동은 9월 추수기의에 실패하고 잔여부대를 이끌고 정강산을 찾았다. 이어 주덕 부대가 합류했다. 이 두 사람의 극적인 만남을 기념하는 다리가 정강산 현지에 있다. 팽덕와 진의도 정강산을 찾았다. 이렇게 네 사람의 중국공산당 초기 영도들이 정강산에서 운명을 같이하기로 했지만,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발족과 더불어 그들의 운명은 조금씩 서로 비껴가기 시작했다. 첫 조짐이자 가장 큰 울림을 준 것이 1959년 여산회의 직후의 팽덕회 숙청이었다.

▲ 팽덕회는 1950년 중공군 사령관으로 한국전쟁에 참여해 널리 알려졌다. 서북인민해방군사사령, 중앙인민정부위원회 부주석 등의 요직을 맡았으나, 1966년 모택동과 대립으로 숙청 당했다. 사진은 팽덕회와 그의 부인

 

대약진운동에 대해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그의 편지가 화를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상의 이유였을 뿐이었다. 당시 중국은 흐르시초프의 등장과 함께 소련의 이른바 수정주의와 투쟁하면서 세계로부터 포위되고 있었다. 모택동의 지도력이 크게 시험대에 올라있는 민감하고 미묘한 시절이었다. 직선적인 성격의 팽덕회가 대약진 운동의 실패사례를 들고 나왔고, 동조가 잇따랐다.

모택동이 팽덕회에게 준 시가 있다.
높은 산, 머나먼 길, 깊은 골짜기/ 대군은 종횡무진으로 내달리 는구나/ 그 누가 말 타고 칼 비껴들었는가?/ 둘도 없는 우리의 팽덕회 장군이어라!

山高路遠坑深, 大軍縱橫馳奔, 誰敢橫刀立馬? 唯我彭大將軍!

1935년 六盤山 전투에서 어려운 싸움을 이겨낸 팽덕회에게 감격의 시를 써주었던 것이다. 이 시를 받아든 팽덕회는 시의 마지막 구절을 “우리의 영용한 홍군뿐이어라!”로 고쳤다고 한다. 그러나 모택동은 이 시를 팽덕회 숙청 이후에도 그냥 그의 시집에 오르도록 했다. 팽덕회는 북경대학과 가까운 吳家花園이란 곳으로 유배되었다가 1965년 9월, 등소평의 고향인 四川省으로 가게 된다. 西南局 제3선위원회의 제3부주임이라는 하위직으로 떠나기 에 앞서 모택동은 팽덕회를 불러 위로를 하고 뒤늦은 화해를 하지만 그 이후로 그들은 다시 만나지 못한다.

1964년 8월에 들어 중국공산당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일으킬 침략전쟁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내륙지방의 건설을 서둘기 시작했다. 공장시설들이 대도시와 연안지역에 집중되어 있어서 반 이상을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미국의 통킹만 공격에서 얻은 충격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은 북베트남의 통킹만을 기습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월남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할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통킹만 공격이 바로 1964년 8월이었고, 1965년 7월엔 존슨 미국 대통령의 월남전에 대한 대량파병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한 급박한 정세 속에서 모택동은 내룩지방 건설을 서둘기 시작했고, 여기에 비록 보잘 것 없는 하위직이기는 하지만 왕년의 국장장관에게 보직을 주어 재기를 도모하도록 했다. 그러나 1966년, 우려하였던 상황, 문화대혁명의 폭발적인 위력에 의해 팽덕회의 재기는 무산되고 오히려 갖은 핍박 끝에 비명에 목숨을 잃게 되고 만다. 팽덕회는 오늘의 중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다. 가장 좌적인 오류, 대약진운동에 대해 그 누구도 감히 직언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그는 충직과 충성으로 혼자 엄청난 희생을 감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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