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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의 삶
박쥐의 삶
  • 심혜련 전북대
  • 승인 2006.09.16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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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난 1992년 독일에 갔다. 2000년 12월에 학위를 마쳤으니깐, 거의 8년 반이라는 시간을 그리고 내 젊음의 시간을 거의 독일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일에 처음 갈 때, 난 참으로 대책없는 유학생이었다. 막연히 계속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생각 외에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학을 마치고, 수업을 들으면서 2년 남짓한 시간을 무엇을 할까로 고민하곤 했다. 수업을 들으면 다 재미있는 것 같았지만, 딱히 박사 논문 주제로 긴 시간을 보내고 싶은 주제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학기에 대중 문화를 철학적으로 다루는 수업을 듣게 되었고, 이 수업에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을 알게 되었다.

난 그의 글들을 읽으면서 일종의 전율을 느꼈고, ‘바로 이거다’라고 생각하면서, 박사 논문 주제로 삼기로 맘먹었다. 지도 교수를 정하고 베를린 자유 대학 철학과에서 베를린 훔볼트 대학 미학과로 학교를 옮김 후 미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 후 벤야민을 공부하면서 매체 미학이라는 학문을 알게 되었다. 철학에서 미학 그리고 다시 세분화된 주제로 매체 미학을 연구하게 된 것이다.

벤야민의 매체 이론에 대한 연구로 학위를 받고 한국에 귀국한 이후 난 정말 다양한 과들을 다니면서 강의를 했다. 철학과, 미학과, 예술학과, 미술대학과 영상대학원 등등 말이다. 박사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다음 연구의 주제로 남겨두었던 디지털 매체 예술 이론을 계속 연구했다.

이러면서 난 스스로 ‘도대체 내 전공은 무엇인가, 미학인가, 기술 철학인가, 또는 예술 이론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해 물음을 갖기도 했었고, 또 다른 사람들도 나에게 묻곤 했다. 도대체 전공이 뭐냐고... 또 지금은 과학학과에서 과학기술 문화와 기술 철학을 중심으로 과학기술과 예술 문화에 대해 강의도 하고 연구도 하고 있다. 정말 박쥐가 된 것이다. 철학, 미학, 예술 이론 그리고 과학기술철학 사이에서 왔다 갔다하는 박쥐가 된 것이다. 이러다보니, 뭐 하나에 정통하기 보다는 범위만 넓어지고 깊이가 없어지는 현상이 생기고 말았다.

 또 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이건 분명 내 탓이다. 학제간에 긴밀한 상호 작용이 요구되는 학문인 경우, 잘못하면 생길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번 여름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후, 처음으로 독일에 갔다. 베를린에서 학위를 마친 뒤, 거의 6년만의 방문이었다. 다시 방문한 베를린은 많은 변화를 보여줌과 동시에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듯하게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기도 했다. 일상적 공간이 주는 공간적 익숙함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익숙함 속에서 공부했던 시간들에 대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철학, 미학, 예술사 그리고 매체학 분야를 왔다 갔다하면서 공부할 때 느꼈던 그 막막함과 힘듬 그리고 즐거움들...

이러한 느낌들을 뒤로하고 독일 칼스루에 있는 ZKM(매체 예술 연구 센터)와 오스트리아 린츠에 있는 Ars Electronica를 방문했다. 두 연구소는 예술과 첨단과학기술의 만남이라는 주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또 이 결과물들을 전시하는 곳이다. 특히 ZKM은 과학, 공학, 철학 그리고 예술 방면에 종사하는 다양한 연구자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난 내가 무척 초라하고 불성실한 박쥐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깊이 없이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깊어짐과 동시에 넓어져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어차피 박쥐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면, 좀 더 나은 박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난 오늘 진정한 ‘황금 박쥐’가 되기를 소망한다.  

 

 

 

 

심혜련 전북대 문화기술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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