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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대학의 탕비실에서
스웨덴 대학의 탕비실에서
  • 김승우
  • 승인 2023.06.26 08: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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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김승우 웁살라 대학 경제사학과 연구원

연구자는 학문 공동체에 속해있다. 동료 학자와 소통하며 자신이 속한 학문 분야의 기존 흐름 위에서 새로운 연구를 이어나간다. 인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는 개인 연구에 몰입하는 경우가 많은 특징도 있다. 그래서 “일상에서 얼마만큼 학문적 소통을 실천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종종 필자를 부끄럽게 만든다. 역사학과에서 금융사를 연구해오던 필자에게 ‘소통’은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료들은 대부분 필자의 연구 분야를 낯설어하고 다른 분과학문의 일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강의와 논문을 통해 알리는 일에도 항상 ‘진입 장벽’이 있었다. ‘당대의 정치 문화와 금융’이라는 말에서부터 시작한다면 설명할 것이 너무 많았다.

최근 스웨덴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됐다. 바로 점심시간이다. 필자의 연구실 바로 앞에는 한국으로 따지면 학과 탕비실이 있다. 커피머신을 비롯한 주방기기와 학과 비용으로 구매하는 과일 바구니가 항상 놓여있는 큰 식탁에서 누구나 식사를 할 수 있다. 정식으로 고용된 박사 과정 연구자부터 은퇴를 앞두고 있는 노령의 교수까지 모여서, 피카(fika)라고 부르는 스웨덴의 커피타임과 점심을 함께 즐긴다.

한국·영국·스위스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스웨덴의 이런 낯선 모습이 ‘교류와 소통’의 출구를 마련해주었다. 영국 대학의 공간은 학부생, 대학원생, 박사 이상의 단위로 나뉘어 있었다. 편한 마음으로 내가 속한 커먼룸(common room)에 출입할 수 있지만, 수직적 교류의 기회는 지도교수와의 면담과 학과 세미나라는 제한적인 곳에서만 허락됐다. 하지만 스웨덴에서 서로의 안부로 시작하는 대화는 다양한 주제와 자기 고민으로 이어진다. 각자의 연구실에서 가지고 있던 생각을 풀어놓기 때문이다.

다양한 전공자들이 모이기에 비전문가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야 한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내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유연하게, 혹은 더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왜 필자의 주제가 스웨덴에서도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누구나 대화에 참여하기에 동료의 고민을 들으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조언과 아이디어를 얻었다.

아울러, 여기서 알게 된 가장 흥미로운 특성 중 하나는 국왕과 왕실 가족을 제외하고는 직함이나 격식체를 쓰지 않는 사회적 합의였다. ‘교수님’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모두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면서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은 미국이나 다른 유럽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고참급 교수에게 농담을 던지던 박사 과정생을 보면서 ‘예의가 없군!’이라고 생각했던 필자는 사실 이곳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대학을 통해 정식으로 고용되는 박사 과정생은 ‘노동하는’ 연구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학문적 인정과 존경만으로도 학문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듯하다. 처음 참가했던 학과 모임에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던 박사 과정생들은 노동자로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웨덴의 점심시간은 다른 세부 전공자들과 자유롭게 대화하며 다양한 학문적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우린 어떻게 이러한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지도교수에게 지나치게 의존적인 구조와 환경,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제도의 부재, 아직까지 연구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학문후속세대의 현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2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국에서 수많은 제도적 실험과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스웨덴에서 바라본 한국의 제도는 경쟁과 시장성에만 초점을 두는 아쉬운 모습이었다. 작은 움직임이겠지만 대학(원)에 학과 공간을 마련하여 학문 공동체 구성원들이 부담 없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보면 어떨까? 식탁과 의자, 그리고 커피 머신은 아니더라도 커피포트와 ‘다달이’ 커피믹스라도 비치해놓는다면 의미 있는 변화의 출발이 되지 않을까? 인터넷과 줌으로 공간을 극복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소통 공간의 중요성을 생각해본다.

김승우 웁살라 대학 경제사학과 연구원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20세기 후반 국제금융사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제네바국제연구대학원 연구원을 거쳐 현재 스웨덴 웁살라 대학 경제사학과에서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모색해온 전후 국제통화체제 개혁 논의를 중심으로 유엔무역개발회의의 역사와 더불어 신자유주의와 금융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A brief encounter: North Korea in the Eurocurrency market, 1973-80』, Cold War History, 『Exclusionary regimes, financial corporations, and human rights activism in the UK, 1973-82』, International History Review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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