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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누리 없는 ‘법’과 포샤의 자비 
에누리 없는 ‘법’과 포샤의 자비 
  • 신희선
  • 승인 2023.06.19 15: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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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_ 신희선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신희선 숙명여대 교수

국립창극단의 「베니스의 상인들」을 봤다. ‘낭만적이고 유쾌한 창극’을 표방한 작품답게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각색한 스토리가 판소리 가락과 결합되어 흥겨운 무대를 보여주었다. 기본 틀과 배경은 동일했지만, 극의 서사는 시대와 관객을 고려해 변형되었다. 한국적 상황을 비춰주는 극창의 언어 표현이 때로는 웃음을 유발하며 깊이를 더해 주었다.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대자본가 샤일록과 소상인 조합을 이끄는 안토니오의 대립구조, 의형제인 바사니오의 사랑을 위해 돈을 빌리며 서명했던 계약서의 ‘1파운드의 살’을 둘러싼 법정 공방에서 창극은 절정을 보여주었다. “에누리가 없는 게 법”이라는 샤일록의 주장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헤아리는 게 자비요,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베푸는 게 자비”라는 포샤의 변론을 들으며, 우리 시대의 ‘법’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노정(勞政)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화물연대, 건설노조, 사내하청 사업장에 대한 정부의 대대적인 감사와 노동계에 대한 압박이 지속되고 있다. “그 어떤 불법행위도 방치·외면하거나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통령이 강력하게 천명하자, 경찰은 캡사이신 분사기 등 진압용 장비까지 동원하고 있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노사 갈등의 장에서 인내심을 갖고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일 터인데, 정당한 법집행을 내세우며 노조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고 노동자를 탄압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국민들이 과도한 집회와 시위로 불편을 겪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심야집회금지법’을 추진하고 있다. 결국 양대노총은 공동행동을 선포하며 정권심판 투쟁을 선언한 상황이다. 

법을 내세운 법만능주의가 정치를 무력화 시키고 있다. 승자독식 시스템에서 배제된 노동자들이 법을 어긴 행동을 보이면 그제서야 언론이 관심을 보였다. “400일 넘게 천막농성을 벌이는 동안 아무도 우리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지 않아 망루에 올랐다.” 노동조건과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이 왜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는지 살피는데 게으른 보수 언론은, 시위와 집회가 정해진 법 테두리를 벗어났다고 ‘준법’을 들먹이는 경직된 법치주의 정부에 일조하고 있다.

권력에 대한 비판적 감시자로서의 역할과 약자 배려라는 가치는 고사하고, 강력한 법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정부의 메시지를 재생산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에는 유독 강경하고, 권력의 부정과 부패에는 관대해 법의 공정성이 의심되는 가운데 조사와 기소가 진행되면서 노동자들의 사회적 죽음이 되풀이되고 있다. 

“가로막고 있는 벽과 장애를 넘는 희망의 메시지 전하고 싶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베니스의 상인‘들’」이라는 창극으로 재탄생시킨 연출가는 젊은 상인들의 공동체적 연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원작의 인물을 재해석한 창극은, 시장 질서를 말하며 자신의 이익만 우선시하는 3대째 재벌인 샤일록과, 소규모 상인들의 조합을 결성해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꾼 흙수저 안토니오의 세계를 대비시키면서, 냉혹하게 법의 집행을 말했던 샤일록이 파멸하는 과정을 완성도 높게 보여주었다.

결국 에누리 없는 ‘법’이 아니라 따스한 ‘자비심’에서 공동체의 삶은 회복된다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보다 인간적인 사회는 법을 앞세우는 것에서가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들의 곁에 머무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법보다 생명의 존귀함이 먼저였던 ‘포샤’의 지혜가 아쉬운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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