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8:05 (토)
피곤에 찌든 ‘피로대학', 바실란도 정신으로 되살리자
피곤에 찌든 ‘피로대학', 바실란도 정신으로 되살리자
  • 김병희
  • 승인 2023.06.13 08: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딸깍발이_ 김병희 편집기획위원 /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김병희 편집기획위원

대학에서 여유와 낭만이 사라져버렸다. 다들 힘들다. 마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대사처럼, 똑바로 읽어도 ‘다들 힘들다’이고, 거꾸로 읽어도 ‘다들 힘들다’이다. 대학 사회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대학끼리는 교육부의 사업 예산을 조금이라도 더 따내려고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교수끼리는 정년 트랙 대 비정년 트랙, 호봉제 대 연봉제, 교수회 대 교수노조 간의 대립과 갈등이 선을 넘었다. 학생끼리는 학점 경쟁부터 취업 경쟁까지 오직 경쟁뿐이다. 

모두가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서만 내달리고 있다. 모두 그렇게 열심히 매진하는데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하고 늘 피곤하기만 할까? 독일에서 활동하는 철학자 현병철이 『피로사회』(2010)에서 현대를 성과주의가 초래한 피로사회라고 진단했다. 요즘 대학의 풍경이 바로 피곤에 찌든 피로대학 같다.

피로대학에서 잠시 탈출하는 방안으로 ‘바실란도’의 가치를 제안하고 싶다. 소설가 존 스타인벡(1902~1968)이 차를 몰고 1만6천킬로미터의 대륙 일주에 나선 때는 1960년 9월이었다. 당시 58세로 노년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혼자 떠나면 너무 심심하겠다 싶어 프랑스산 푸들 ‘찰리’를 길벗으로 데려갔다. 넉 달 동안 34개 주를 돌아본 작가는 『찰리와 함께한 여행(Travels with Charley)』(1962)이란 여행기를 출간했다. 

이 책에는 바실란도(Vacilando)라는 스페인어가 나온다. 코네티컷주에서 만난 어떤 상점 주인은 작가를 보며 부러워했다. “아아, 나도 갔으면 좋겠다!”, “왜 여기가 맘에 안 드십니까?”, “아닙니다. 여기도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가고 싶군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그러세요?”, “그거야 상관없습니다. 아무 데나 가고 싶어요.”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구속받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돌아다니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작가는 이런 마음을 바실란도라는 말로 설명했다. 바실란도란 대강의 방향은 정해져 있더라도 목적지에 도달하든 안 하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태도이다. 목적지에 다다르는 성과보다 여정 자체를 즐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동쪽에서 서쪽까지 드넓은 대륙을 횡단한 스타인벡은 마침내 고향인 캘리포니아주 몬테레이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는 고향에서 자신이 한낱 이방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도망치듯 고향을 빠져나와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 후 그는 『분노의 포도』로 노벨문학상(1962)을 수상했다. 

피로대학에서 벗어나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하는 대학인들이 많으리라. 교수나 학생이나 모두에게 바실란도를 권하고 싶다. 가려는 방향은 정해놓더라도 목적지에 도착하든 중간에 멈추든 크게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대학인들 역시 빈손으로 원점에 다시 돌아와도 좋다. 길을 떠난다고 해서 반드시 뭘 느끼고 뭔가를 얻고 돌아와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지금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바실란도란 단어 하나만 배낭에 넣고 당장 떠나보자. 목적지에 도착하는데 집착하지 말고 여정 자체를 즐겨보자. 작가의 옆에 애견 찰리가 있었듯이, 바실란도 여정에 함께할 친구가 곁에 있다면 더더욱 좋겠다.

대학에서 여유와 낭만이 사라져버렸다고 말하면 성과주의자들은 한가한 소리 하고 있다고 비판할 것이다. 과도한 성과주의로 인해 대학은 이미 뼛속까지 골병이 들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미국의 미네르바 스쿨 같은 대학을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기존 대학의 틀을 깨고 미래의 대학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명성을 얻은 미네르바 스쿨 같은 대학 말이다. 

교육부가 대학 정책을 좌우하는 마당에 우리나라 대학의 교수나 학생들은 스타인벡처럼 바실란도를 즐길 여유조차 없다. 대학이 정녕 이래도 되는지 짙은 회의감이 몰려온다면 한 번쯤 고물차를 몰고 어디로든 떠나야 한다. 숙소도 예약하지 말고 가다가 나타나는 곳에서 잠을 자고, 길섶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몸으로 두 눈으로 두 귀로 있는 그대로 느껴보기 바란다. 그 과정에서 떠오르는 자신의 내면풍경을 지그시 바라보자. 지금의 대학 사회에 성과주의보다 바실란도 정신이 필요한 이유가 떠오를 것이다.

김병희 편집기획위원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