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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들은 “잘 들었다”는 인사말
서울에서 들은 “잘 들었다”는 인사말
  • 정주혜
  • 승인 2023.06.12 0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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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정주혜 경상대 철학과 박사과정
정주혜 경상국립대 철학과 박사과정

지난 5월 13일, 흔들리는 고속버스를 타고 심란한 기분으로 서울로 향했다. 꼭두새벽부터 나온 탓에 좌석에 앉자마자 눈이 감겼지만 얼마 못 가 멀미에 잠을 깰 수밖에 없었다. 도착까지는 여전히 두 시간이 넘게 남아 있었는데, 옆자리에 동행한 강사 선생님은 철학강의 동영상을 함께 듣자며 끼고 계시던 한쪽 이어폰을 내미셨다. 그러나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속이 울렁거려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과 시위를 핑계로 4년 전에 찾았던 서울을 31년 인생에서 세 번째로 가는 날이었다. 철학 연구자로는 첫 상경이었다. 운 좋게 학문후속세대 발표를 맡게 되어 28개의 철학학회가 함께하는 한국철학자연합대회라는 성대한 축제의 한 켠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는데, 왜 나는 이 좋은 날 몸과 마음이 불안한 걸까. 그런 생각과 함께 버스 천장을 바라보며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돌이켜보면 사실 나는 이미 그 불안의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나는 ‘연구자’로서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은연중에 늘 비교 대상으로 삼고 있었던 동년배의 수도권 연구자들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 역시 달갑지 않았다. 그때 나는 내가 가면 안 될 곳에 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고 있었던 것이다.

1년 전 수업시간에 한 교수가 학계에서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일로 “지방대 학력 세탁”을 운운했던 적이 있다. 물론, 그 교수님은 ‘인서울’ 대학 출신이었다. 당시 내가 모멸감을 느꼈던가? 떠올려보면 그때 기분이 나쁘긴 했으나 원래 막말을 자주 하는 교수니 그 정도는 참을 만하다고 생각하고 그 순간을 보내버렸었다. 학력, 성·계층·인종·장애 등에 대한 차별은 마치 미세먼지와도 같은 것이어서, 내가 그것을 늘 마시며 몸 안에 쌓여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기조차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럼에도 그 기억이 마치 스냅사진처럼 생생한 이유는, 내가 사후적으로 그것을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규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수도권대학에 근무하면서 동시에 그 대학의 학력을 세탁해야 할 것으로 보는 모순적인, 그래서 지극히 ‘현실적인’ 그런 관점은 어찌 보면 연구자들 모두를 열등감으로 밀어 넣는 차별의식이 얼마나 뿌리 깊고 공고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플로티누스(Plotinus)의 유명한 유출설처럼, 모든 학문적 자원과 자존감의 원천인 서울이라는 일자(the one)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연구자들은 그 존재 정도가 점점 흐릿해지는 것처럼 취급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취급을 똑같이 당한다고 해서 모든 비수도권대학 연구자들이 나와 같은 심리적 반응을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적어도 그날 나는 금방이라도 픽 꺼질 듯한 기분으로 서울 땅을 밟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존재론적으로 흐릿한, ‘지방대’ 연구자를 다시 생생하게 만든 것은 반동적인 의식이 아닌 구체적인 체험이었다. 그날, 떨리는 학문후속세대 발표 이후 한 이름 모를 연구자가 “잘 들었다”는 인사말과 함께 내게 웃어 보였고 나 역시 기쁜 마음으로 그 웃음을 돌려주었다. 먼 길을 나와 함께 해준 동료들의 응원과 교수님들의 격려도 한 몸에 받았고, 다른 발표를 들으면서 누군가의 열정에 공명하기도 했다. 

처음으로 한국여성철학회에 참석한 강렬한 경험도 잊기 힘들 것이다. 내가 가진 학문적 관심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앞서 그것을 연구해왔던 선배 연구자들이 이만큼이나 모여있다니! 그때 느꼈던 잔잔한 벅차오름은 아무리 뒤늦게 냉소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정도로 생생했다. 이후 내가 깨달은 한가지는, 지방대생이라는 꼬리표가 나 자신과 나의 연구, 내가 소속된 대학과 학문공동체를 이루는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은 연구자로서 나의 삶과 활동 속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과 체험이 가능해지려면, 최소한 비수도권의 학문공동체가 유지되어야 하며 연구자들이 생존문제나 좌절 때문에 연구를 그만두지 않을 정도의 지원과 정보, 자원이 비수도권대학에도 충분히 주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환경이 갖추어져야만 비로소 비수도권대학의 연구자들은 그들의 삶을 이루는 현실적이고 특수한 지역적, 사회적 조건들을 바탕으로 기존 연구들과 확실하게 차별화되는, 민감하고 독창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정주혜 경상국립대 철학과 박사과정
경상국립대 철학과에서 「라캉의 실재개념에 대한 비판적 독해 -주디스 버틀러의 ‘담론의 구성적 외부’ 개념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페미니즘과 비거니즘, 동물권 등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 진주성폭력피해상담소 젠더폭력조사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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