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00:50 (토)
국가 연구개발 30조 시대, 연구비 집행 ‘네거티브 규제’ 필요
국가 연구개발 30조 시대, 연구비 집행 ‘네거티브 규제’ 필요
  • 송병찬
  • 승인 2023.05.31 09: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고_ 송병찬 한국연구재단 연구위원

 

송병찬 한국연구재단
연구위원

2년 전 정부는 연구자의 불필요한 행정 업무를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해 국가연구개발혁신법(이하, 혁신법)을 제정했다. 부처별로 산재한 연구개발 지원 관련 법령, 규정을 하나로 통합한 것으로서 어느 부처의 과제를 수행하더라도 같은 기준과 절차를 적용해서 연구자의 불편을 최소화 하겠다는 취지다.

이에 대해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에서는 작년 말 ‘연구현장에서 바라보는 국가연구개발혁신법’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대학, 정부출연연구소, 기업 등에 소속된 연구자 대상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절반이 조금 넘는 정도의 연구자가 바뀐 제도를 경험하였고, 이 가운데 절반은 기존과 변화가 없는 것으로 응답했다.

조사 항목에 있어서도 협약, 평가, 연구비 사용계획, 연구비 정산의 간소화가 설문 결과에 포함된 반면에 연구자가 일상적이고 빈번하게 접해야 하는 연구비 집행 기준과 절차에 대해서는 보여지지 않았다. 

한편, 연구자가 연구비 반납 등의 제재 심의 대상이 되는 사례들을 보면 불법적인 연구실 랩비 조성이나 업체와의 이면 외상거래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 과거에는 연구비의 개인적인 유용을 위한 것이었다면, 최근에는 연구비 집행의 기준과 절차가 복잡 다단함으로 인해 행정 편의를 도모하는 이유로 없어져야 할 관행이 이어지는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구실에서 영수증 처리, 물품 구매와 같은 행정적인 일을 처리하는 학생들이 불편을 호소해 외상장부를 만들게 되었다는 연구자의 설명은 연구비 집행과 관련된 중첩된 문제를 실감케 한다. 반면에 연구자가 소속된 기관의 연구비 관리 담당자들은 관련 규정이나 매뉴얼에서 명시적으로 허용되지 않은 물품의 구매 등은 연구자 입장에서 연구에 필요한 경우에도 불허하거나, 일일이 상위 부처나 기관에 물어서 확인을 받아 허용하고 있다. 연구 종료 후 실시하는 연구비 정산이나 감사에서 불인정 되어 반납해야 하는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다.  

소모적인 일 계속...연구현장 권한과 자율성 부족이 원인

이런 소모적인 일이 계속되는 것은 세세한 것들까지 허용 범위를 정하고 있는 퍼지티브식 상위 규정과 불합리한 기준과 절차를 개선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연구현장의 권한과 자율성 부족이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혁신법 이름에 걸맞는 정도로 연구자가 체감할 수 있는 제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가연구개발사업 연구비 집행 기준을 네거티브 규제화 하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  

현재 모든 정부부처 연구개발 지원사업에 적용되는 ‘국가연구개발사업 연구개발비 사용 기준’과 이에 대한 참고서 성격인 ‘국가연구개발 혁신법 매뉴얼’은 각각이 두꺼운 책 한권 분량으로, 연구개발비의 사용용도 및 인정기준, 집행 절차 등을 세세하게 구분하여 열거하고 있다.

이러한 퍼지티브 규제 방식에서 벗어나 대원칙으로 금지한 행위(연구 외 용도 사용, 연구개발 기간 외 사용 등) 외에 연구 또는 해당과제 수행과 관련된 집행은 기본적으로 허용하되, 부당 집행이 확인되는 경우에는 법적 책임을 물어 강력히 처벌하는 선진국형 ‘네거티브 규제’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정부가 지원하는 연구비도 일반적인 회계 기준에 따라 관리하고 필요 시 기관별 연구비 중앙관리 체계에 따라 자체기준을 마련하여 적용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신뢰, 자율, 책임을 바탕으로 투명하면서도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연구자 중심의 제도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행정 업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현실

구체적으로, 혁신법 시행령 별표 2의 연구비 사용용도도 인건비, 직접비(시설장비비, 연구재료비, 연구활동비 등), 간접비 정도만 남겨 놓고 회의장 임차료, 속기료, 통역료, 회의비, 세미나 참가비, 야근 식대 등 수십 개의 세목은 삭제하거나 사용용도의 예시로써만 활용되어야 한다. 당초 규정에 ‘...등’으로 설명되어 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세목화 되었고, 연구비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에서는 세목별로 시스템 상에 필수적으로 기재해야 하는 내용까지도 규정됨으로써 관련 행정 업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비슷한 예로써 연구시설장비비의 풀링제 시행이 있다. 기존 규정의 연구장비재료비 비목을 재료비와 시설장비비로 분리해 시설장비비는 연구종료 후에도 적립해서 쓸 수 있는 풀링제가 적용되었다. 

그러나 연구자들이 더 빈번하게 지속적으로 집행하는 재료비야 말로 풀링제 적용이 시급한 비목이었음에도, 전담기관이 따로 있는 시설장비에 대해서만 풀링제 추진을 위해 굳이 비목을 분리했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두 비목을 합쳐 풀링제를 확대 적용함으로써 연구자들이 부득이하게 외상거래를 하는 것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  

사회와 과학기술이 급변하는 시대,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는 네거티브 규제로의 전환 요구가 증가하고 있다. 특히, 30년 이상 축적된 관리 체계를 가지고 연구과제를 통해 특정한 목적과 집단(대학, 출연연, 기업 등), 한정된 인력(연구자, 학생 등)을 지원하는 국가연구개발사업은 네거티브 방식의 규제 적용이 상대적으로 용이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국가 연구개발 30조 시대, 자율과 책임의 연구 생태계를 바탕으로 명실상부한 선진국형 국가혁신체계 확립을 기대해 본다.

송병찬 한국연구재단 연구위원
현재 한국연구재단 국책연구본부 국책사업평가1팀에 있다. 연세대에서 과학기술정책학 박사학위 과정에 있으며, 한국연구재단에 2006년 입사 이후 BK21, 산학협력, 원천연구, 기초연구, 성과관리 등을 담당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