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 지워버린 기억을 삶으로 이어간다는 것
죽은 자는 산 자 속에 살아 있다
“제주 4·3 사건의 완전한 해방”을 향한
『화산도』의 작가 김석범의 문학적 고투
75년이 지나도록 파묻혀 있는 제주 4·3 사건의 진실. 재일 조선인 작가 김석범은 아흔여덟 평생, 글을 무기 삼아 그 기억의 말살과 대결해 왔다.
이 소설은 그의 대표작이자 4·3을 다룬 유일한 대하소설인 『화산도』(1997)를 이어 마무리하는 작품이다. 1948~49년 제주 4·3 항쟁과 친일파 처단이라는 문제를 지주로 삼았던 『화산도』에 이어, 『바다 밑에서』(2020)는 항쟁의 패배 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일본으로 도망한 남승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고문이 남긴 상처와 학살의 기억, 혼자 도망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그를 통해, 작가는 4·3의 진실과 그 현장에서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의 목소리를 전한다.
그리고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도리어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고 있던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남승지라는 재일 조선인 청년을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캐묻는다.
원한의 땅, 조국 상실, 디아스포라의 존재.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망각의 시대에 경계인이기에 도리어 집요하게 매달려 썼던 이 작품은 김석범 문학의 원점이자 기나긴 소설의 끝맺음이다.
사건을 생각하면 화가 치민다. 화가 나니까 소설을 쓰는 것이다. 쓰고 싶다는 마음이 나를 죽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오래 살았다.
- 출간 기념 작가 인터뷰 중에서
이 노작가의 글쓰기는 기억을 흔적 없이 지우고 죽은 자들을 소리 없이 산 자로부터 빼앗아 가려는 거대한 시간의 수레바퀴 아래, 자신의 늙고 가난한 몸을 밀어 넣어 그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추어보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고군분투에 너무 오래 빚지고 있다. 그는 올해 아흔여덟 살이 되었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