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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풍경의 간극 천호동 거리
[중앙대]풍경의 간극 천호동 거리
  • 유석천 편집위원
  • 승인 2006.08.07 1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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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거리

장덕배 (유달수에게 소리친다) 우리도 이렇게 살지 말자. 구사거리 다 쓰러져 간다고 인간 들까지 이 따위로 살지 말자구……

장진의 데뷔 희곡 <천호동 구사거리>의 마지막 대사다. 신사거리로 진출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재단사 유달수가 그야말로 ‘잘난’ 마누라에게 배신당하는 걸 지켜보며내지르는 장덕배의 고함은 구사거리를 소외시킨 장본인들에게 전하는 원망이다.

번화한 신사거리와 달리, 구사거리는 한적했다. 두 거리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재개발 지역이라는 플랜카드가 휘날리고, 삼십년 나이는 족히 먹었음직한 아파트들이 드문드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구사거리. 위풍당당하게 하늘을 찌를 듯 선 신사거리의 현대백화점에 대응하기 위한 신세계백화점의 발버둥이 초라한 아울렛 매장을 탄생시키기까지 그 곳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동네였음이 분명하다.

천호동은 마을 앞에 굽은 다리가 놓여 있어 곡교리라 불리다가 1963년 1월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수천호(數千戶)가 살만한 땅이라 하여 천호동(千戶洞)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인 1936년에 광진교가 건설됐다. 배가 아니면 통행이 막막했던 천호동이 광진교 개통으로 숨통이 트였다. 서울길이 뱃길에서 육로로 바뀌면서 천호 구사거리는 광주, 하남, 이천, 여주 등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변모됐다. 이 때부터 천호동은 자연스럽게 재래시장이 형성되는 등 상권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천호동 423번지’는 서울 도심의 윤락가 지역이 재개발됨에 따라 변두리 지역이었던 천호동 구사거리로 밀려들어 80년대 말까지 전성기를 구가하였고, 90년대 후반까지 200여개의 업소가 난립하면서 윤락가의 대명사로 불리게 됐다. 그러다보니 천호동 423번지 이미지가 강해 ‘천호동=윤락갗를 먼저 떠올릴 만큼 천호동과 윤락가는 밀접한 관계를 형성해 왔다.

유달수 …… 좌우지간 저 놈의 사창가를 죄다 없애버려야 돼. 어디 가서 천호동에 산다고 그러면 한다는 소리가 “가봤수?”, “정말 물이 좋습디까?” 이러니…… 동네 챙피해서 원…….
장화이 너무 그러지 말아요. 다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나도 가다가다 보면 언젠가 그쯤에서 깨지겠지 뭐.

필자는 천호동 구사거리에서 ‘장화이’를 만났다. 윤락가에 사진기를 들이댄 찰나였다. “뭐 찍는 거에요?”라고 날카롭게 따져 묻는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허름한 윤락가 골목에서 튀어나온 그녀는 다방 레지였다가 그 곳으로 흘러들어온 장진의 ‘장화이’였다. 무척이나 음습하여 애처롭기까지 한 ‘천호동 423번지’에서 ‘장화이’는 그렇게 꼭꼭 몸을 숨긴 채 외부와 단절되어 가고 있었다. 성매매 알선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제정 등 정부의 강력한 성매매방지 종합대책의 추진으로 지금은 불과 몇 업소만 자리를 지킬 뿐 인적이 뜸한 ‘장화이’의 삶터. 변화를 조용히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겠지만 점차 소외되어 가고 있는 구사거리의 한 부분을 목격한 듯하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동부서울의 교통·상업의 중심이며 한강상류 청정지역에 위치하고 있지만, 도시계획시설이 미비하고 낙후한 천호동을 어떻게 변모시킬 것인가 오랜 시간 고민했던 구청장은 ‘천호뉴타운사업’을 전개하였다. 우선 천호구사거리와 천호대로가 만나는 신사거리를 잇는 300m구간을 일방통행으로 바꾸고 사람이 중심인 ‘로데오 거리’를 만들었다. 최근 한강변 청정지역인 천호 2, 4동 지역 약 12만 4천 평에 ‘천호뉴타운지구 개발기본계획’이 서울시로부터 승인되어 추진 중이라니 이제 곧 천호동은 쾌적하고 활기찬 도시환경이 조성될 것이다. 윤락가와 재래시장 지역 일대도 선도사업으로 선정돼 개발에 착수함으로써 동부서울의 쇼핑과 문화의 명소로 변신을 추진하고 있어 ‘제2의 천호동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이 지역이 개발되면 그동안 감추고 싶었던 과거, ‘천호동 423번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개발에 시선을 맞춘 정책이 “가다가다 보면 언젠가 그쯤에서 깨지겠지 뭐”라며 씁쓸히 웃던 ‘장화이’를 염두에 두었을지 모르겠다. 천호동 구사거리 귀퉁이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움츠려 있을 그녀에게 어떤 보상이 내려졌을까 자못 궁금하다.

유석천 편집위원 pocaontas1000@cau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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