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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이 인식한 냉전은 무엇이었을까
한국인들이 인식한 냉전은 무엇이었을까
  • 우동현
  • 승인 2023.02.02 0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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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 시대, 우리에게 ‘냉전’은 무엇이었나_ 새 연재를 시작하며

20세기는 실로 미국의 세기였다. 
그러나 각국이 그 힘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 속에서 한국인들이 인식한 냉전은 무엇이었을까? 
또 한국이 치른 냉전은 ‘신냉전’을 사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역사적 통찰과 의미를 건네줄까?

한반도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한국전쟁은 냉전의 판도를 바꿨다. 하지만 정작 한반도는 냉전기 세계사의 무대에서 배제되었다. 남북한 지도자들은 한반도의 주변부성(marginality)을 이용해 독재체제를 수립하고 산업화를 추구했다.

물론 차이점도 있었다. 한국이 미국의 영향력 아래서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경제성장을 일군 반면, 북한의 산업은 소련·중국과의 제한적인 교류 속에서 심각하게 정체됐다. 한국은 1980년대 성공적으로 민주화를 쟁취하며 냉전의 수혜자 반열에 들었다.

한국과학원(KAIS) 설립의 타당성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1970년 여름 내한한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조사단의 모습이다. 출처: 『KAIST 50년사 역사집』(2021). 

유례없는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일군 한국인들에게 냉전이란 말은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한국이 어떻게 냉전을 치렀는지에 대한 연구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냉전기 한국의 역사를 차분히 성찰하기도 전에 우리는 ‘신(新)냉전’의 세계로 진입했다.

인간 마음·극지방·우주까지 나아간 냉전사 연구

신냉전은 오늘날 미국 주도의 서구 세계와 중국 주도의 비서구 세계 사이의 갈등을 묘사한다. 강대국들이 총포를 사용하지 않을 뿐, 시장 지배와 자원 확보를 두고 경쟁하는 상황을 의미하다. 물론 우크라이나에서는 열전이 벌어지고 있지만 말이다.

이번 연재는 (신)냉전에 관심을 가진 이들을 대상으로 냉전사의 최신 연구 동향을 소개한다. 서구 학계에서는 개별 연구자가 일생을 바쳐도 정독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성과가 쌓였고, 계속 새로운 저작이 나오고 있다.

냉전사라는 틀 안에서 개별 국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에 대한 연구와 함께, 과학기술·생태환경·생명공학(의학)·감정 등을 매개로 간학제적·탈학제적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연구의 공간적 범위는 인간의 마음과 오대양 육대주를 넘어 극지방지하, 대기권우주에까지 미친다. 이러한 최신 연구의 주요 성과와 논의 지형을 파악하는 작업은 ‘신냉전’인 오늘날을 이해하는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다.

1990년대 한국과학기술원(KAIST) 대덕캠퍼스 전경이다. 카이스트의 전신인 한국과학원은 미국 국제개발처의 원조를 바탕으로 1971년 설립됐다. 카이스트는 냉전기 한·미 지식교류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관이다. 출처: 『KAIST 50년사 역사집』(2021).
미국 국제개발처에 제출된 한국과학원 설립 최종 보고서. 출처: 『KAIST 50년사 역사집』(2021).

‘전체주의론’ 지배적 연구패러다임 형성

일반적으로 냉전은 1940년대 중후반부터 소련이 해체되는 1991년까지의 시기를 일컫는다. (냉전의 단일한 기원은 없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차가운(冷) 전쟁을 뜻하는 ‘콜드 워’는 미국과 유럽 대륙에서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냉전의 ‘냉전적’ 용법은 『1984』로 잘 알려진 영국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나 미국 언론인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에 의해 자유주의 세계에서 냉전 초기부터 널리 쓰였다. ‘콜드 워’의 러시아어·문화어 번역어인 ‘kholodnaya voina’와 ‘랭전’은 1950년대 후반부터, 주로 자유주의 세계를 비판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담아 쓰였다. 아쉽게도, 이러한 용법은 냉전기 열전을 겪은 비서구 지역의 냉전 경험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했다.

냉전사 연구는 냉전의 역사를 탐구하는 학술 분야이다. 냉전기, 냉전사 연구는 ‘철의 장막’ 너머의 소련 진영과 ‘죽(竹)의 장막’ 너머의 중국에 대한 적(敵) 연구가 주를 이뤘다.

하지만 관련 자료 확보가 어려운 가운데, 나치 독일을 피해 망명한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세운 이론적 토대에 소련 진영에서 이탈한 사람들의 진술과 기억이 쌓여 ‘전체주의론(totalitarianism)’이라는 지배적인 연구 패러다임이 형성됐다. 엄밀한 자료 검토를 특징으로 하는 역사학적 접근은 1970년대부터 시작됐으나, 전체주의론은 아직도 강고하게 남아있다.

냉전기 한국의 국가정보기관은 북한 관련 자료를 많이 수집했다. 물론 북한을 역사적으로 탐구하는 일은 어불성설이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논의는 전체주의론을 북한에 덧씌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90년대 문서고 혁명 이후 연구 패러다임 전환

냉전사 연구의 패러다임 전환에는 1990년대 문서고 혁명이 큰 역할을 했다. 적의 ‘속내’를 보여주는 데이터가 공개되면서 실증적인 신냉전사 연구(New Cold War history)가 시작됐다. 필자가 앞으로 소개할 연구들은 이러한 연구사적 조류에 동참하고 있다.

이 연구들은 소련이 서구의 예측보다 훨씬 더 취약했고, 소련의 압제에 시달린 것으로 인식된 제2세계는 오히려 소련을 괴롭혔으며, 미국과 중국의 결탁은 오랫동안 준비된 것이었고, 제3세계는 강대국들의 간섭에 나름대로 능숙히 대응했음을 밝힌다. 한편 2000년대 부상한 냉전 지구사(Global Cold War) 연구는 미국과 소련의 대결이라는 도식적 이해를 강화하기도 했다.

아울러 독자들은 이 연재에서 아메리카 제국(American Empire)의 부상과 그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견할 것이다. 20세기는 실로 미국의 세기였다. 그러나 각국이 그 힘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 속에서 한국인들이 인식한 냉전은 무엇이었을까? 또 한국이 치른 냉전은 ‘신냉전’을 사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역사적 통찰과 의미를 건네줄까? 이에 대한 생산적이면서도 흥미로운 대답을 이 연재에서 찾길 바란다.

우동현 객원기자 / 광주과학기술원(GIST) 위촉연구원

UCLA에서 과학기술사(북한-소련 관계사)로 논문을 쓰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국사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The Historical Journal』에 한국인 최초로 논문이 게재됐다. 역서로는 『체르노빌 생존 지침서』, 『플루토피아』, 『저주받은 원자』, 국제공산주의운동을 2차 세계대전의 원인으로 풀어낸 『전쟁의 유령』(가제)이 있고,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총서 36권 및 38-39권을 공역했다. 주요 관심사는 냉전사, 핵역사, 기술환경사, 디지털역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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