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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재앙은 왜 꼭꼭 숨겨지나…‘표현의 전쟁’ 시대
환경 재앙은 왜 꼭꼭 숨겨지나…‘표현의 전쟁’ 시대
  • 김재호
  • 승인 2023.01.25 09: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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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 롭 닉슨 지음 |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580쪽

돈으로 거대 기업의 과오 덮는 수사학 
무형의 위험에 형태 부여·줄거리 만들기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 대한 공방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몇몇 제조·판매사는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판결이 났다. 하지만 가습기 살균제를 만드는 데 다른 성분을 사용한 일부 제조사는 2심에 매달려 있다. 관련 특별법까지 제정됐지만 책임 규명과 처벌은 요원하다. 1994년 처음 출시된 가습기 살균제는 2023년의 대한민국을 여전히 뒤흔들고 있다. 느리게 스며든 폭력을 드러내는 과정에는 부자인 거대 기업과 빈자인 피해자들이 대립한다. 

 

롭 닉슨 미국 프린스턴대 영어과 교수이다. 그는 프린스턴 환경연구소의 환경인문학 이니셔티브 소속 교수이기도 하 다. ‘느린 폭력’에 맞서는 작가-활동가의 면모를 강조했다. 사진=프린스턴대

미국 프린스턴대 영어과 교수인 롭 닉슨은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를 출간했다. 프린스턴환경연구소의 환경인문학 이니셔티브 소속 교수이기도 한 닉슨은 ‘느린 폭력’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눈에 보이지 않게 일어나는 폭력, 시공을 넘어 널리 확산하는 시간 지체적 파괴, 일반적으로 전혀 폭력으로 간주되지 않는 오랜 시간에 걸쳐 벌어지는 폭력.” 예를 들면, △기후 변화 △녹아내리는 지구 빙권(冰圈) △독성 물질의 이동 △생물 증폭(먹이사슬로 인해 물질 농도가 증가하는 현상) △삼림 파괴 △전쟁으로 인한 방사능 물질 피해 △해양 산성화 등이 느린 폭력이다.  

1991년 12월 12일 작성된 로런스 서머스 세계은행 총재의 메모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겼다. “세계은행이 공해 산업은 최빈국으로 더 많이 이전하도록 장려하면 어떻겠는가?” 닉슨 교수는 “부국의 독성 물질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륙에 떠넘기면, 건강에 위협을 주고 보기에도 역겨운 쓰레기와 산업 폐수를 반대하는 부국 환경주의자들의 압박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라며 “서머스는 보기 흉한 쓰레기와 눈에 보이지 않는 대륙 아프리카를 곧바로 연결 지었다”라고 비판했다.  

2003년 <뉴욕타임스>에 실린 사설은 “미국은 거기서 주둔한 12년 동안, 적어도 150만 명의 인명을 학살하거나 학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거기서 주둔한 12년 동안”으로 한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환경과학자 아널드 섹트의 연구, 국립과학아카데미 의학연구원 산하 위원회 등의 조사에 따르면, 고엽제 살포로 나타나는 다이옥신 수치는 생물 증폭을 통해 여러 주민과 생물들한테 세대를 거쳐 퍼졌다. 닉슨 교수는 “언뜻 보기에 천진해 보이는 이 소박한 문구는 폭력의 범위를 규정하는 우리의 수사적 전통이, 일상적으로 계속되며 뒤늦게 드러나는 피해를 얼마나 묵살하고 있는지 강력하게 일깨워준다”라고 지적했다. 

거대 기업들은 엄청난 돈을 투입하며 자신들의 과오를 덮는 수사학을 펼친다. 그래서 느린 폭력을 드러내는 ‘표현의 전쟁’이 필요하다. 닉슨 교수는 환경 분야의 작가-활동가에 주목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서서히 펼쳐지는 숱한 환경 재앙은 단호하게 결집하고 행동하기 위한 노력을 가로막는 엄청난 표현상의 애로를 겪는다.”, “느린 폭력에 맞서려면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장소에 치명적 피해를 안겨주는 무형의 위험에 형태를 부여하고 그와 관련한 줄거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에드워드 사이드, 레이첼 카슨, 라마찬드라 구하

닉스 교수는 주류의 사고에 맞선 3명의 인물 소개했다. 미국 컬럼비아대 비교문학 교수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 과학저술가 레이첼 카슨(1907∼1964), 인도의 환경운동가이자 사회학자 라마찬드라 구하. 닉슨 교수는 이들에 대해 “저항의 표본인 그들의 삶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았다”라고 적었다. 예를 들어, 카슨은 군산복합체가 물리적·수사적으로 화학 물질, 특히 DDT의 유독성을 호도하는 현상을 비판했다. 카슨은 『침묵의 봄』(1962)를 통해 ‘빈자의 환경주의’에 강력한 호소력을 전파했다. 이외에도 인도 보팔에서 발생한 가스 유출 사건을 다룬 인드라 신하의 『에니멀스 피플』(2007), 토지 유실과 사막화에 대항해 그린벨트운동을 이끈 케냐의 왕가리 마타이(1940∼2011) 등이 등장한다. 

닉슨 교수는 작가-활동가에 주목하는 이유에 대해 “글쓰기는 느린 폭력이 초래하는 피해를 얕잡아보는 집요한 습성에 도전장을 던진다. 또한 감각적 보강 증거를 찾지 못한 ‘이해’에 창작의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라며 “따라서 작가-활동가의 내러티브적 상상력은 우리에게 전과는 다른 유의 증언, 즉 보이지 않는 풍경에 대한 증언을 제공한다”라고 강조했다.  

특히 우리가 고민해야 할 핵심 문제에 대해 닉슨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서서히 마멸되지만 이미지를 중시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센세이션 중심의 테크놀로지가 보기에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재난을 어떻게 이미지며 이야기로 전환할 수 있느냐.”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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