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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 힘겨운 여성 연구자의 꿈
멀고 힘겨운 여성 연구자의 꿈
  • 강일구
  • 승인 2023.01.16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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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 신진 여성 연구자 실태
여성 연구자들이 사라지고 있다. 여성 대학원생은 1980년대 이후 계속 늘어났지만, 인신과 출산 그리고 대학원의 열악한 연구환경이 중첩돼 이들을 구조적으로 학계에서 밀어내고 있다. 사진=픽사베이

“‘결혼하면 끝난다. 끝장이다’, ‘진짜 아무것도 안 된다.’ 그런 공포가 좀 있어요. … 들었던 얘기 중에 무서웠던 이야기가 ‘나도 결혼 전에는 그냥 연구자였다. 그런데 결혼하는 순간, 아이를 낳는 순간 그냥 여자애였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30대 수도권대 연구자 A)

“한 후배가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아이를 낳았어요. 논문이 남아 있는데 몇 년째 돌아오지 못하고 있어요. 후배는 너무 돌아오고 싶어해요. … 여성 연구자는 가족 구성원이 (연구를) 얼마나 지지해 주느냐에 따라서도, 기혼자의 경우에는 엄청난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40대 수도권대 강사 B) 

그 많던 여성 대학원생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여성 신진 연구자들의 응어리 진 대답을 담은 연구가 지난달 발표됐다. 김지수(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박사과정), 김화연(중앙대 사회학과 석사과정), 천주희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이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인문정책연구사업’의 일환으로 수행한 「인문사회 분야 여성 신진연구자 실태에 관한 연구」가 그것이다.

이 연구는 1980년 이후 40년간 여성 대학원생이 34.6%의 증가세를 보이고 특히 인문사회 모든 전공계열에서 여성 대학원생이 늘어났음에도 이들이 학계에 안착하지 못한 채, 왜 떠나고 있는지에 대한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담았다. 연구에 참여한 여성연구자는 모두 23명이며 인문사회분야 국내 박사과정 이상의 학력을 갖고 있다.

연구진은 현장의 여성 연구자들이 ‘여성’으로서 겪는 모든 학술장의 문제를 개인적 차원에서 대응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대학원에서부터 시작되는 각자도생의 연구문화와 열악한 연구환경, 여성에 대한 차별과 고립 등이 교수 등으로 안착하기 전 이들을 위태롭게 한다는 의미다. 특히, 여성 연구자들은 출산·육아의 순간에도 제도적인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분투하며 해결하고 있음을 연구진은 확인했다.

연구진이 만난 자녀가 있는 C씨(40대 비수도권대 연구교수)는 임신을 했을 때 “저보고 ‘미쳤다’, ‘너 진짜 용자(용기 있는 자)다. 어떻게 애 가질 생각을 하냐’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동료 박사가 둘째가 생겨 퇴직했을 때도 “(육아와 연구를 병행하는 일이) 힘들고 고단하다는 것을 알지만, 여기서는 당장 해줄 수 없다는 게 암묵적으로 통용”되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출산과 육아로 인해 경력단절이 되고 이후 일과 생활을 양립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고 공감하는 분위기가 여성 연구자들이 있는 공간에 깔려있다는 의미다.

"출산휴가 쓰는 일은 선례를 만들어야 하는 일”

연구진은 여성 연구자가 결혼, 임신, 육아를 잘 드러내지 않는 이유를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기혼 여성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문화’에서 이유를 찾았다. 자녀가 있는 D씨(30대 수도권대 연구자)는 “학술 활동하는 사람 중 자녀가 있음에도 ‘티가 나지 않도록’ 행동하거나 이야기하지 않고, 아예 비혼을 선택하거나 결혼을 늦게 하는 여성 연구자들을 주변에서 본다”라고 했다.

자녀가 있는 E씨(30대 비수도권대 연구자)도 “비혼 상태로 활발하게 연구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결혼을 해서는 안되는가’를 생각하게 되고, ‘결혼을 하면 사회적으로 여자들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은 것’을 상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학계에서 임신, 출산, 육아 등에 관한 이야기는 저출생, 인구감소, 가족형태 변화 등과 같은 사회적 주제로는 다루지만 연구자들의 삶에서는 중요한 의제가 되지 못한다.

대학 내 연구원‧연구소에 소속된 여성 연구자가 출산 휴가를 쓰는 일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선례를 만들어가야 하는 시도’라고도 했다. F씨(30대 수도권대 강사)는 “여자 교수가 되지 않는 이상, 여자 교수가 된다고 해도 학과 일에 전념하지 못한다라는 인상을 줄까 봐 출산휴가, 육아휴직 같은 걸 제대로 쓸 수 없고, 정규직 교수 전까지는 제도 자체가 보장이 거의 잘 안 된다”라고도 했다. 또한, 여성 대학원생에게는 출산과 육아가 휴학을 위한 사유 그 이상으로 제도적으로, 문화적으로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으며 여성 대학원생을 ‘미혼 무자녀’로 여기며 학업에 매진할 것을 요구받는 분위기도 있다고 여성 연구자들은 말했다.

학업 재개에 대해서도 어려움을 호소했다. E씨는 출산 후 박사 논문이 중단됐고 공부의 흐름을 잡아 논문을 쓸 수 있는데 1년 반이 걸렸다고 했다. 경력이 단절됐던 것이다. 그는 출산 후 공부의 흐름이 끊겼고, 아이가 돌이 될 때까지는 공부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가 강의 제안을 받으며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고 했다. C씨도 “주변에서 애 낳고 연구자로 돌아온 사람은 저와 선배 2명밖에 없다. 다 나가거나 아니면 돌아오지 못했다”라고 했다.

석사 때 비슷했던 성비가 왜 박사때 무너지나?

자녀가 있는 G씨(40대 수도권대 강사)는 대학과 직장 어린이집을 구하지 못하는 데 어려움을 호소했다. 자녀가 없는 F씨는 “전업 대학원생이라고 해서 (신분에 대한) 증빙을 하려고 하더라도 제대로 안 되고, 임신, 출신, 양육 에 있어 제도적 지원이라는 것도 없다. “석사까지만 하더라도 성비 비율은 남성이 6 여성이 4였다. 그런데 박사과정 때는 재학생 5명 중 여성은 저 혼자였다” (30대 수도권대 박사과정 H) 

한국교육개발원의 교육통계서비스 ‘계열별 졸업자’ 현황(2021)을 보면, 석사 졸업자 8만30명 중 여성 비율은 4만2천866명(약 54%)이지만, 박사 졸업자 1만6천420명 중 여성 비율은 6천464명(39%)으로 그 수가 확연히 줄어든다. 연구참여자들은 상위과정일수록 주변에서 여성이 사라지는 문제에 대한 인지는 물론 경험을 통해 그 원인 또한 파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학원에서 여성 연구자 비율 감소에 대해 열악한 연구환경시기도 남성 교수와 선배의 무시와 차별, 성차별에 기반한 교수 채용, 그림자 노동과 과로 등을 들었다.

2000년대 초반에 대학원을 다녔던 C씨는 과거 대학원 진학 후 남성 교수들과 선배들의 노골적인 차별을 증언했다. 그는 “‘넌 뭐가 되려고 왔니’, ‘왜 왔냐’, ‘너 같이 노는 애가 오면 안 된다’ 이런 이야기로 시작해, 위계화시키는 특정 선배가 있었다. … ‘너한테 기대하지 않았어’라는 말은 언제든 들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 대해 교수가 흉을 보거나 남자 선배들의 무시도 있었다고 밝혔다.

C씨의 경험은 2000년대 초반의 일이지만 지금도 여성 연구자들은 간접적 방식으로 성차별을 경험하고 있었다. H씨(20대 수도권대 박사과정)는 행정 일을 갑작스럽게 던져주며 다른 지역 출장을 보낸다고 했고, I씨(20대 수도권대 박사과정)는 은근히 피하면서 말을 걸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공식적이고 중요한 일은 남성 연구자에게 맡기고 부차적인 일은 여성 연구자에게 맡기는 관행도 있다고 참여자들은 밝혔다. 하지만, 이 같은 차별과 배제에 대해 여성 연구자들은 목소리를 내는 것이 대학원이란 좁은 커뮤니티의 공동체성을 해치는 일로 여겨질 것을 우려해, 후배 연구자나 선배 연구자들을 개별적으로 단속하는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다고 했다.

여성 연구자들이 사라지는 이유로 참여자들은 ‘미래 없음’을 들기도 했다. 여성 박사가 배출되더라도, 채용시장에서 남성을 선호하거나 남성교수만 있는 환경을 보며 ‘미래를 생각해 볼 표본이 없다’라는 것이다. 한국연구재단에서 나온 ‘4년제 대학의 전임교원 성비현황(2021)’에 따르면 인문사회 분야 여성 전임교원의 비율은 32.2%다. 또한, 교수 채용만이 아니라 취업 후 연구비 지급의 격차를 확인하며 비관하기도 했다. J씨(30대 수도권대 강사)는 연구비 지원 과정에서 유자녀 남성 연구게 돈을 우선적으로 배분하는 문화가 있다고 했다. 한국연구재단 자료에서도 2021년 1인당 연구비의 경우 남성 교원이 1억1천435만 원인데 비해 여성 교원 연구비는 4천57만 원이었다.

현 교수 보며 미래에 교수 될 수 없다 자각

도달하기 힘든 ‘좋은 연구자’ 상에 대해서도 언급됐다. J씨와 K씨(30대 비수도권대 연구교수)는 한때 교수를 모두 롤모델로 삼으며 연구자 꿈을 키웠으나,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환경이 다름을 깨닫고 좌절했다. J씨는 “교수님이 뛰어난 연구자이고 인격적으로 훌륭해 롤모델로 삼았다. 그러나 교수의 아버지도 교수였다. 내가 삼은 모델이란 게 시대적 토대도 다르고 삶의 환경도 달랐다”라고 말했다. 특히, 여성 연구자들은 유학을 다녀오거나 SKY출신의 남성 교수들이 그 위치에서 가능했던 능력 발휘, 연구자로서 역량 강화를 요구받고 다른 한편으로 ‘흠잡을 곳 없는’ 여성 교수처럼 살 수 없다는 현실을 자각했다.

연구진은 이러한 인식에 대해 “이전 세대부터 이어져 오는 젠더화된 대학의 불평등 구조이자 학벌중심사회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고 해석했다. 또한, 이 같은 상황을 깨달은 여성 연구자들은 기존 교수처럼 살 수 없음을 지각하고 다름 삶을 모색한다고 했다. 대학에 자리를 잡는 게 어려워 대학이 아닌 곳에서 연구자로서 삶을 지속할 방법을 찾는다는 의미다. 연구진은 이 같은 이탈에 대해 “여성 연구자에게 주어진 이 과제가 새로운 분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될지, 아니면 학계에서 멸종을 가속화하는 촉매제가 될지 그 답은 우리 손에 담겨 있다”라고 말했다.

“악습인줄 알면서도 … 외부 기관 개입  필요”

연구진은 인문사회 분야 여성 연구자 지원 정책 마련을 위해 ‘여성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과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을 모델로 삼았다.

연구진은 “실태조사는 물론 대학원과 학회의 젠더화 된 문제들이 제기될 때 여성 연구자들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제도나 기관도 전무하다. ‘뻔하기까지 한 문화’가 악습이고 폐습이라는 점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반복돼 온 것은 대학원과 학회 ‘밖’에 그것을 해결하거나 돕기 위한 대안적 제도나 기관이 부재했기 때문”이라며 외부 기관의 개입 필요성을 제기했다. 

연구진은 먼저 인문사회 분야 여성 신진 연구자에 대한 정기적인 실태조사를 실시할 것과 연구문화를 개선할 정책 추진 주체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특히 실태조사는 통계적 수치만이 아니라 개인적, 사회적, 환경적 요인까지 파악할 수 있는 질적 접근도 해야 한다고 했다. 

이번 실태조사를 진행한 연구진은 여성 연구자들이 임신과 출산 등의 문제를 개인 단위에서 해결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대학원 내에서 갈등이 벌어졌을 때는 공동체성을 깨지 않기 위해 개별적으로 단속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사진=픽사베이 

연구문화 개선의 추진 주체로는 한국연구재단 안에 ‘인문사회 분야 여성 연구자 육성과 지원을 위한 위원회’를 설치할 것과 인문사회 분야 여성 신진연구자 담당관 배치를 제안했다. 여성과학기술인이 많이 재직하는 공공기관에 관련 담당관을 두어 채용‧지위‧연구문화 등을 개선하는 것처럼 인문사회 분야에 대해서도 같은 역할을 할 인적 인프라가 필요하다고 했다. 연구진은 추가로 학교‧지역‧학회‧연구소 단위를 넘어 상호 교류할 수 있는 네트워크 지원에 대한 정책적 방안 마련과 연구과제 공모 시 심사 기준에서 연구원 성비 기준을 마련할 필요도 있다고 제기했다. 

여성연구자가 이공계에 비해 인문사회계에 많은데도 외부의 개입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연구를 수행한 김지수 씨는 “물리적 수가 많다고 해서 학술사회 내 여성연구자가 정착하고 있다는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라며 입을 뗐다. 그는 “이번 연구에서 드러난 점은, 인문사회 분야 여성 대학원생의 물리적 수는 많음에도 실제 박사학위 소지 후 학내사회에 안착해 활동을 유지하는 연구자 비율이 높지 않거나, 최소한 연구참여자들은 거의 체감하지 못한다는 것”이라며 “WISET이나 ‘여성과기인법’ 등의 사례에 준거해 기초적인 제도나 기관이 만들어진다면, 인문사회분야 연구자 재생산 문제를 파악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함께 연구를 수행한 김화연 씨는 “비교적 자원이 풍부한 이공분야도 해당 학술장의 힘으로만 ‘해결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인문사회분야보다 가시적인 형태의 차별이 누적돼 있고, 해결을 위한 구성원의 노력이 있었다. 또한, 4차 산업혁명에 따른 국가 인적 자원으로서의 과학기술인 양성이라는 정책적 관점과도 맞아 떨이지는 부분이 있었다”라고 밝혔다. 이공계의 성비 불균형이 다른 분야에 비해 두드러진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이 과학기술인 양성 정책에 일부 반영됐다는 의미다. 가령, 정부는 ‘여성과학기술인 잠재가치가 발현되는 사회 구현’을 목표로 4차 기본계획(2049~2023)을 추진 중에 있다.

끝으로 김지수 씨는 “인문사회계 여성연구자는 이공계에 비해 거의 주목받지 못했고, 특히 출산과 양육, 젠더화 된 네트워크 문제 등은 학술생태계 의제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다”라며 “무엇보다 학계 여성연구자가 점점 사라져가는 상황에서 불안정함 속에 놓인 여성연구자들이 연구를 통해 서로를 만나가는 과정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정서적 위안을 얻고, '연구하며 사는 삶'을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 이번 연구가 의미를 가졌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강일구 기자 onenin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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