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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반론_이정우 대표의 글(교수신문 제402호)을 읽고 재차 답함
재반론_이정우 대표의 글(교수신문 제402호)을 읽고 재차 답함
  • 홍윤기 동국대
  • 승인 2006.06.19 0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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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體 개념 이해 못해” … 탈영토화 실효성 있나

▲홍윤기 동국대 교수, 철학 © 한겨레
천규석 선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이다’에 관한 ‘황해문화’ 서평에서 내가 비판한 것에 이정우 씨가 반론하고 내가 다시 거기에 반론하라는 ‘교수신문’의 요청을 받아들였을 때 나는 내심 두 가지를 기대했었다. 그 첫 번째는 “불어 원서로 읽지도 못하는” 터에 “학문적으로 미숙한” 대학원생의 번역본만 읽고 자꾸 세간에서 들뢰즈/가타리를 오해하거나 왜곡한다고 이 대표가 불평하는데, 본인은 그 책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한 번 들어보자는 호기심이었다. 그런데 지난번 글(비평, 401호)에서 이미 나는 그의 원전 또는 번역본 독해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원전에 입각해서’ 근거를 밝혔다. 그런데 나에 대한 재반론에서(402호, 5면) “내용/표현, 실체/형식을 도식한 (들뢰즈/가타리의) 그림”을 잘못 이해에서 자기에게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면서 하는 얘기는 또 다시 나의 지적 호기심을 저버렸다.

‘가로줄’의 있고 없음의 차이에 대하여


우선 지난 번 쟁점은 들뢰즈/가타리가 “매끈매끈한 공간”, “줄줄 홈패인 공간”, “숭숭 구멍난 공간”이라고 구분한 것들 사이의 차이가 이 씨의 주장대로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이렇게 되면 이것들 사이의 구분은 ‘개념적’ 구분이 아니게 된다) 아니면 나의 생각대로 ‘질적 대립’까지 함축하는 각기 다른 실체를 의미하는지 여부였다. 이번에 제시된 이 씨의 의견에 따르면, “들뢰즈/가타리에게 ‘내용의 실체와 형식’, ‘표현의 실체와 형식’은 있어도 ‘실체의 내용과 표현’, ‘형식의 내용과 표현’ 같은 것은 없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있고 그것의 내용과 표현이 있는 것이 아니며”, “내용과 표현이 각각 어떤 것, 무엇인데”, 이 씨가 보기에 나는 ― 그의 뜻을 정확히 이해했다면 ― ‘그 어떤 실체’(X) 하나를 먼저 상정하고 나서 ‘그 X’의 내용과 표현, ‘그 형식’의 내용과 표현이라고 읽어 “그림의 가로를 먼저 읽고 세로를 읽어야 하는데, 그것을 거꾸로 읽어” 자신으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내가 ‘실체’를 그 어떤 독립적 존재물로 이해했다고 ― 내가 보기에 ― “상상/억측”하고 있다.


기억을 새롭게 하기 위해 지난 번(401호) 내가 어떻게 얘기했는지 상기해 보자. 이 씨가 잘 읽었다고 자처하는 그림을 두고 나는 “누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적어도 들뢰즈/가타리 텍스트의 이해가 문제된다면 거기에서 ‘매끈매끈한 공간’이라는 ‘표현’은, 그 누구도 아닌 들뢰즈/가타리 자신에 의해, ‘숭숭 구멍난 공간’을 ‘내용’으로 하는 ‘실체’단정적으로 연관지어져 있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나는 바로 “들뢰즈/가타리 자신은 서로 성격이 차이나는 공간들 서로 구별되는 삶의 방식의 ‘실체’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고 첨언하였다.(강조는 이번에 가한 것임) 이 씨는 나의 이 문구 중 “‘숭숭 구멍난 공간’을 ‘내용’으로 하는 ‘실체’”라는 구절을 따로 떼어 ‘(어떤) 실체가 있어 그 실체가 숭숭 구멍난 공간을 내용으로 한다’고 풀어읽은 것이다.


사실 나는 당시 원전의 도식을 옮길 때 원저자들이 본래는 긋지 않았던 가로줄을 두 줄 그어 넣어 “내용”과 “표현”의 ‘실체적’/‘형식(태)적’ 차이를 부각시키려고 의도했었다. 만약 이정우 씨가 내 그림을 유심히 보았다면 원전의 도식 하나도 제대로 베끼지 못했냐며 실소 정도가 아니라 아예 파안대소를 했을 텐데 그렇지는 않은 것 보니 내가 그려 넣은 두 개의 가로줄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파안대소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잠깐만 참아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브라이언 마쑤미의 영역본(416쪽)도 불어 원전의 도식을 나처럼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나와 마쑤미의 이 한미합작 그림에 대해 두번 파안대소하겠다면 못 말리겠지만.)


자 그럼, 나와 마쑤미가 가공한 위의 도식을 보면서 원전의 아래 도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살펴보자. 이 도식에 붙은 공리Ⅲ에서 원저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유목적 전쟁기계의 형식(형태)으로 표현된 것’의 ‘내용’은 ‘순회성 야금술의 형식(형태)을 가진 것’인데, 바로 이 유목적 전쟁기계의 형태는 순회성 야금술의 형태라는 내용의 “표현 형태로서”(comme la forme d'expression) 존립하고, 바로 그런 표현-내용 관계로 ‘상호연관’돼(correative)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상호연관되어 있는 내용과 표현은 (오른쪽 도식에서 따로 부각시킨 대로) 그 ‘실체’에 있어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실존 방식의 표현과 그 내용은 “상호연관”되어 있으면서도 (아마 이 점에서 이정우 씨가 공간의 차이를 정도의 차이라고 단정한 것 같은데), 바로 그 내용과 표현이 각기 자기 실체를 가진다는 것이다.(이 씨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문제는 ‘내용’과 ‘표현’이 각기 그 실체와 형식(태)에서 질적으로 차이날 정도로 통째로 개념적으로 구분되고(그래서 왼쪽의 본래 그림에는 일체 가로줄 없이 세로줄만 있다), 그에 따라 당연히 ‘실체’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공간으로 포착된다는 것이다(그래서 그 부분을 주목하라고 내가 의도적으로 가로줄을 그어 실체란과 형식(형태)란을 구분했다). 따라서 “숭숭 구멍난 공간”을 “내용”으로 하는 “실체”와 ― 지난번에는 생략한 구절이지만― “매끈매끈한 공간”을 “표현”으로 하는 “실체”는 ‘실체’라는 글자의 기표로서는 일치하지만 그것의 기의는 질적으로 다르다.(결국 이 씨는 ‘내’가 그은 가로선만 봤지, 그가 숭모하는 원저자들이 그은 세로선은 전혀 보지 못했고 그 의미도 몰랐다.)

실체는 그냥 질료가 아닌 “형태지어진 질료”


그럼 그 질적으로 다른 그 기의는 무엇인가. 이 점은 들뢰즈/가타리가 유목론(nomadology)을 특징적으로 부각시키려는 개념구도와 전략적으로 연관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매끈매끈한 공간으로 ‘표현’되는 것은 유목적 전쟁기계와 연관시키고, 그 ‘내용’인 숭숭 구멍난 공간(이것은 광산 갱도의 비유이다)은 대장장이와 연관시킴으로써 줄줄 홈패인 공간과 연관된 정주민의 생활양식을 질적으로 추상화시키는 추론과정을 밟아간다. 그것은 곧 ‘관념적 차원에서’ 정주민적 생활양식으로부터의 탈주선을 닦는 관념적 작업, 즉 탈영토화의 철학적 전략과 바로 연결된다. 문제는 이런 철학전략이 영토성 해체의 전략으로서의 실천적 효과가 의문시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정우 씨는 왜 들뢰즈/가타리가 자신들의 그림에서 세로선만 그어 내용/표현을 엄격히 단절시키면서 그와 동시에 그 두 공간의 실체까지 구분하고 있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두 공간의 차이가 단지 ‘정도’ 차이라는 소리만 계속 되풀이하는가. 나는 이번에 비로소 그가 들뢰즈/가타리의 실체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이 씨는 “‘실체’란 어떤 것, 무엇이 아니라 어떤 것의 질료/물질을 뜻한다. ‘형식’은 어떤 것의 구조를 뜻한다”고 얘기하는데, 실체에 대한 이런 식의 허술한 진술은 그가 과연 원전의 관건개념을 제대로 숙지했는지 의심하게 만들어 나로 하여금 失笑가 아니라 신笑를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바로 그가 숙독하라고 권한 면들 바로 앞에서(원전 55쪽; 국역본 88쪽) 들뢰즈/가타리는 “실체들(les substance)이란 형태지어진 질료들(matieres formee)에 다름 아니다”라고 명시적으로 규정한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실체란 “어떤 것”의 질료들이 아니라 ‘특정 형(식)태를 가진’ 질료들이다. 따라서 그 형태가 무엇이냐에 따라 “영토성 및 영토화 및 그것들의 정도”와 그와 대립되는 “탈영토화”와 그 정도가 관련된다. 따라서 실체가 다른 것은 단지 양적이거나 경험적 정도(degree)가 다를 뿐아니라 (탈)영토의 구획이나 질적 상태가 달라질 정도로 구별되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에서 “전쟁기계는 전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단정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시비하지 않겠다. 그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려 “전쟁은 전쟁기계의 조건도 목적도 아니지만, 그것의 필수적 동반물이거나 보완물”이라고(원전 520쪽; 국역본 800쪽) 규정했다는 것만 구차하게 상기시켜주겠다.


결국 나는 두 번에 걸친 원전 놀음에서 그로부터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의 허술한 오독과 억측을 일일이 쫓아다니는 일에 더 이상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정우 씨를 비판하게 된 일차적 동기는 이렇게 원전을 두고 그와 지적 놀음을 하자는 데 있지 않았다.

“공적 사과 없으면 더 이상 논쟁 않겠다”


나는 그가 천규석 선생의 책을 두고 “무지의 용기 혹은 지적 몰이해”라고 몰아붙이면서 철학의 공론장과 민주주의적 참여권을 오염시키는 온갖 인신공격을 가하는 것에 분노해서 이정우 비판에 나섰다. 그러나 나는 그가 최소한 유감을 표시했으면 하는 두 번째 기대를 전혀 바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의 반박을 꼬박꼬박 챙기면서도 그는 “설사 내가 틀렸다 해도 ‘사기극’이 무슨 말인가. 논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을까.”(강조 필자)라고 역정을 낸다. 그럼 되물어보자. “설사 천규석 선생이 틀렸더라도 ‘무지’니 ‘지적 몰이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최소한의 예의도 모르는 무례한 모욕인가?”


이정우 씨가 그렇게 자신에게 돌아올 예의를 챙기는 사람이라면 한 가지 요구하겠다. 그가 먼저 철학의 공론장을 오염시킨 자신의 무례와 불손함을 공적으로 사과하라. 그런 “최소한의 예의”조차 표시하지 않는다면 나는 논쟁을 포함해 더 이상 그와 일체의 학문적, 인간적 교류를 하지 않을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번 사단이 ‘철학함의 민주주의’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나온 인간적 충정임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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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랑 2006-11-25 16:53:46
가지고, 철저하게 그 인식상의 오류만을 드러내어주는 글이 계속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인간적인 교류/같은 건, 별개로 하여, 감정의 대립이 아닌 철저한 철학적 공부의 장이
이 지면을 통해 계속된다면, 저처럼 그저 공부하려는 사람에겐 좋은 기회가 될 듯합니다.
그러한 논쟁은, 오히려 깊은 철학적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6-07-10 10:39:00
들뢰즈/가타리 나부랑이에

이렇게 법석떨만한 어떤 게 있다기보다는

서로 싸우고 물어뜯고 싶은 인물들

핑곗겨리 대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판단이 옳을 것임.

이거말고도 무주무쥐 많을 것임.

친북vs반북, 노빠vs한빠, 좌파vs우파...

들뢰즈/가타리같은 수입품 말고 토종도 이렇게 많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