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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과 베버리지의 엇갈린 운명
처칠과 베버리지의 엇갈린 운명
  • 김재호
  • 승인 2023.01.10 0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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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베버리지와 ‘베버리지 보고서’

단독 저술로 출간, 63만5천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
사회복지·평등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노동당이 압승

1943년 3월, 영국의 윈스턴 처칠(1874~1965) 총리가 라디오에 출연했다. 그는 모든 시민에게 사회보장을 위한 사회보험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며 ‘요람에서 무덤까지’라고 요약했다. 1942년 12월, 보편적 사회복지의 토대인 『베버리지 보고서』(이하 보고서)가 출간된 이후의 일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는 이제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구호가 됐다. 그런데 사실 보고서에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표현이 없다. 미디어에서 보고서의 의미를 간결하게 표현하면서 생긴 말이다.

 

1904년 윈스턴 처칠(왼쪽)과 1910년 윌리엄 베버리 지의 모습이다. 이 둘은 서로 가까웠지만 『베버리지 보 고서』 때문에 멀어졌다. 사진=위키피디아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보고서를 집필한 이는 바로 윌리엄 베버리지(1879~1963)다. 베버리지는 변호사로서 런던의 자선단체인 토인비홀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빈곤 퇴치의 필요성을 느꼈다. 정부에서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민보험 실행 관련 업무를 수행했다. 1919년, 베버리지는 런던정경대학(LSE) 총장이 되어 18년 동안 대학 행정을 도맡았다. 1933년에는 나치 독일에서 해직된 교수를 돕기 위해 ‘학문원조위원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1937년, 옥스퍼드대 유니버시티칼리지 학장을 맡았다. 1941년 공직에 돌아온 베버리지는 사회보험과 관련 서비스에 대한 부처 합동위원회를 이끌었다. 그 다음해에 역사적인 보고서가 탄생했다. 보고서는 국민최저선, 보편주의 원칙, 완전고용, 사회보장 계획을 강조했다. 원래 이름은 ‘사회보험과 관련 서비스’였다. 보고서를 만드는 데 1년 6개월이 걸렸다. 

원래 보고서는 정부의 업무 조정작업을 하는 정도로 고려됐는데, 베버리지가 일을 너무 열심히 했다. 영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보고서에 담긴 내용을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책임에 대한 정책적 쟁점을 부담으로 느꼈다. 그래서 위원회에 참여해 작업한 공무원들을 자문관으로 격하했다. 베버리지에게 보고서 수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베버리지는 거부했고, 결국 단독 저술로 출간됐다. 

노동부로 다시 돌아와 일을 하던 베버리지는 낙심했다. 그 당시 노동부 장관이 허울뿐인 위원회에 자신을 앉혔다고 화를 낸 것이다. 하지만 보고서는 베버리지를 영국 복지국가의 아버지로 불리게끔 했다. 괴팍한 성격이었던 베버리지는 지적 오만도 있었다고 한다. 

딱딱한 정책을 다룬 보고서는 총 63만5천 부가 팔렸다. 보고서는 발간되자마자 3시간 만에 7만 부가 팔렸다. 사람들은 10펜스짜리 보고서를 구입하기위해 1마일(약 1.6km) 넘게 줄을 섰다. 그때 영국 국민의 95%가 보고서의 존재를 인식했다. 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히틀러의 지하 벙커에서도 발견됐다고 하니 그 유명세가 대단했다. 

 

‘자유집산주의’로 사회보장 강조

처칠의 운명은 보고서에 의해 좌절됐다. 베버리지를 추천하기도 했던 처칠은 1945년 총선에서 보고서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였다. 반대로 노동당은 보고서를 당의 공약으로 전면에 내세웠다. 전쟁을 겪은 영국은 사회복지와 평등주의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그 결과, 총선에서 노동당이 하원 590석 중 393석을 얻어 압승했다. 보수당의 처칠은 보고서로 인해 정치적 생명이 끊긴 셈이다.  

보고서를 구체화 한 건 존 케인스(1883~1946)였다. 케임브리지대에서 수학하고 강의했던 케인스. 그는 보고서를 현실화 하는 데 필요한 재정 조달을 위해 3인의 소위원회를 구성했다. 특히 보고서의 초기 비용을 연간 7억 파운드에서 4억5천만 파운드로 낮추도록 했다. 4억5천만 파운드는 기존의 사회보험을 위한 3억1천500만 파운드보다 조금 높은 금액이어서 보고서의 실현 가능성을 높일 수 있었다. 아울러, 아동수당을 두 번째 자녀 이후부터 주거나, 연금제도의 도입을 20년 시간을 두고 점차 확대하는 방안 등의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는 “케인스와 베버리지는 무조건 시장기구를 신뢰하고 정부 개입을 반대하는 고전적 자유방임주의를 찬성하지 않았다”라며 “두 사람은 기본적으로 정부 개입을 찬성하되 다만 정부의 개입은 꼭 필요한 문제에 한정해야 하며, 결코 과도하게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라고 평했다. 케인스와 베버리지는 자유주의와 집산주의(collectivism)의 두 면모를 동시에 갖춘 ‘자유집산주의’ 사상가로 간주된다. 

2차 세계대전 후 케인스와 베버리지의 사상은 30년 동안 복지국가가 꽃피울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그 이후 국가 부채의 누적, 1970년대 석유위기 등으로 작은 정부, 친기업, 반노동 정책 등으로 판세는 뒤집혔다. 그런데 2008년 미국 월가에서 촉발된 금융위기로 지나친 시장만능주의는 비판을 받게 됐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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