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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23] 딸이 『작은 아씨들』를 쓰는 동안 아버지는 노예를 접대했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23] 딸이 『작은 아씨들』를 쓰는 동안 아버지는 노예를 접대했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3.01.09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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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모스 브론슨 올컷
『작은 아씨들』의 저자 루이자 메이 올컷. 메이 올컷은 브론즈 올컷의 딸이다. 사진=위키미디어  

시몬 드 보부아르, 수전 손택, 마거릿 애트우드, 어슐러 K. 르 귄, 조이스 캐럴 오츠, 도리스 레싱, J. K. 롤링, 줌파 라히리, 거트루드 스타인 등 수많은 여성 작가들에게 영감을 준 『작은 아씨들』은 미국의 소설가 루이자 메이 올컷(Louisa May Alcott, 1832~1888)이 1868년에 낸 소설이다. 주인공인 마치 가의 네 자매 가운데 둘째 조는 바로 작가 자신의 분신인데, 보부아르가 조를 자신과 같다고 하면서 사회가 아무리 잔인해도 극복할 수 있다는 의지를 배웠다고 한 것처럼 많은 여성 작가들도 같은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작은 아씨들』은 19세기 미국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매사추세츠 주에 살고 있는 청교도 중산층 가정인 마치(March) 가족 네 자매의 성장과 가족생활을 그려낸 자서전적인 작품이다. 청교도임을 보여주는 점은 아버지의 직업이 목사라는 것과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이 자주 언급된다는 것이다. 다만 작품에서 아버지는 남북전쟁에 나갔기 때문에 소설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작가 올컷의 실제 아버지는 이상에 치우쳐 살림살이를 등한시해 딸들과 갈등을 빚었고, 딸들이 생계를 책임져야 했지만 소설에서는 아버지가 이상주의적인 행동으로 가족들을 궁핍하게 할지언정 가족의 사랑을 받는 자상한 아버지로 등장한다. 그러나 생활 차원에서 아버지와 갈등이 있었지만 딸들은 아버지를 존경하여 그의 사상을 따랐다. 그래서 작가 올컷도 아버지와 같은 초월주의자로서 노예제 폐지론자이자 여성주의자가 되었다. 

19세기 반인종주의자·페미니스트 올컷
 
작가 올컷의 아버지인 에이모스 브론슨 올컷(Amos Bronson Alcott, 1799~1888)은 미국의 교사, 작가, 철학자, 개혁가이다. 올컷은 4년간 학교 교육을 받은 뒤 행상으로 살다가 행상이 영혼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 페스탈로치를 따르는 혁신적인 방법으로 교육하는 교사가 되었다. 규칙으로 수업을 시작하는 것을 반대하고 학생들이 자기 삶의 사건에 대한 개인적인 이해를 표현함으로써 글쓰기를 배우게 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리고 대화 방식에 중점을 두고 전통적인 체벌을 피하면서 어린 학생들과 상호 작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척했다. 

에이모스 브론슨 올컷은 『작은 아씨들』을 쓴 루이자 메이 올컷의 아버지다. 사진=위키미디어

올컷은 교육은 즐거운 경험이어야 한다고 믿고, 수업에 체육, 무용, 미술, 음악, 자연 학습, 일간지 쓰기 등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처음에는 학교가 성공적이었지만 성경에 대해 의문을 품는 태도, 그리고 "유색인종 소녀"를 수업에 받아들였기 때문에 실패했다. 금전적인 성공을 위해 타협을 꺼렸기 때문이다. 그는 1830년부터 노예제도에 반대하고 여성의 권리를 옹호했다. 또한 인간의 정신을 완성하기를 희망했으며 이를 위해 식물성 식단을 옹호했다. 또 오염을 비난하고 생태를 유지하는 인간의 역할을 장려함으로써 현대 환경주의의 선구가 되었다. 

1836년부터 올컷은 에머슨(Ralph Waldo Emerson)과 친구가 됐다. 이후 초월주의의 주요 인물이 되어 현실보다는 이상에 기울어 교육과 공동체 등의 다양한 초월적 실험을 했다. 에머슨은 올컷을 천재라고 <일기>에 쓰고 소로는 올컷을 ‘몽상가’로 보았음에도 자신의 롤모델로 존경하였다. 

당시 뉴잉글랜드 아나키스트들에게 노예제도는 특히 국가의 부당성과 국가에 대한 저항이나 탈퇴 필요성의 표시로서 문제되었다. 올컷은 ‘뉴잉글랜드 비저항 협회’의 다른 회원들과 함께 1840년대에 매사추세츠주 하버드에 프롭스랜즈 코뮌(Froffs lands Commune)을 설립했다. 1840년 처음으로 세금 납부를 거부한 사람은 소로가 아닌 올컷이었다. 올컷은 뒤에 1846년 소로가 나중에 수감되었던 바로 그 감옥에 1843년에 수감되었다. 당시 찰스 레인(Charles Lane, 1800~1870)은 <리베레이토>(윌리엄 로이드 게리슨의 노예폐지와 비저항 저널)지에서 올컷의 ‘양심적 거부’를 옹호했다. 

유토피아로 가기 위한 실험실, 프루트랜드

『자발적 정치 정부(A Voluntary Political Government)』에서 레인은 국가를 제도화된 폭력으로 설명했다. 그는 "강제된" 기독교와 동등한 강압적인 국가를 같다고 보았다.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손에는 칼을 든 사람들에 관한 한 교회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국가가 그렇게 하는 것도 똑같이 악마적이지 않은가?" 레인은 교회가 자발적으로 유지되는 것처럼 국가의 모든 진정한 목적이 자발적인 원칙에 따라 수행될 수 있다는 사실이 아직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의 통치는 여론에 의해서만 용인된다고 믿었다. 자발적 원칙에 대한 의존은 그가 옹호하고 있던 완전히 자발적인 사회와 일치하는 "친절하고 질서 있고 도덕적인 수단"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자발적인 교회뿐 아니라 자발적인 국가도 갖게 하자. 그러면 자유인이라는 호칭을 주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올컷은 레인과 협력하여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자신의 교육 이론을 유토피아 사회로 확장하고자 자치체 생활에 대한 초월주의적 실험인 프루트랜드(Fruitlands)를 설립했다. 10그루의 오래된 사과나무만 있음에도 프루트랜드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낙관적으로 시작하면서 그 지역을 인간 소유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목표는 에덴을 되찾고 개인이 "자연, 동물의 세계, 동료, 자신 및 그의 창조주와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을 제공할 농업, 식단 및 번식의 공식을 찾는 것이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가능한 한 경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생활하면서 스스로를 '동포가족'이라고 불렀다. 

올컷과 레인이 건설한 프루트랜드의 건물 중 하나. 사진=위키미디어
올컷과 레인이 건설한 프루트랜드의 건물 중 하나. 사진=위키미디어

브룩팜(Brook Farm)이라는 유사한 프로젝트와 달리 프루트랜드의 참가자는 다른 지역사회와의 상호 작용을 피했다. 처음에는 착취적인 동물 노동을 경멸하면서 인간의 삽질을 중시했으나 결국 은 일부 소들이 "노예"가 되는 것을 허용했다. 또한 그들은 커피, 차, 알코올음료, 우유를 마시지 않고 물과 빵과 과일만을 먹고, 따뜻한 목욕물을 금지했다. 가죽, 목화, 비단, 양모로 된 옷도 노예 노동의 산물이라는 이유로 입지 않았다. 그러나 실험 공동체는 7개월 만에 실패했다. 부분적으로는 대부분의 땅이 경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열 살이었던 루이자 올컷은 나중에 『초월주의의 야생귀리(Transcendental Wild Oats, 1873)』에서 당시의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이 현대의 순례자들은 황야에 새로운 세계를 세우기 위해 구세계로부터 희망을 품고 나아갔다.” 그러나 "형제들은 정원과 들판을 삽질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며칠 동안 그들의 열정은 놀라울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후 올컷과 그의 가족은 평생 동안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교육 프로젝트에 전념했고 흑인노예 보호에 앞장섰다. 

루이자 올컷의 『작은 아씨들』와 일: 경험 이야기』

그 뒤 올컷 가족은 콩코드로 옮겨와 살았다. 루이자 올컷은 그 시절을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했는데 『작은 아씨들』은 그때의 경험에서 나왔다. 브론슨 올컷은  도주 노예를 지하역으로 ​​비밀리에 접대했다. 1846년 멕시코-미국 전쟁이 시작되자 올컷은 이 전쟁을 노예 제도를 연장하려는 노골적인 시도로 간주하고 이 나라가 "정복에 열심인 사람들, 멕시코의 황금 보물을 우리 손에 넘기고 외국 사람들을 예속시키려 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러나 "차갑고, 무정하며, 정신이 없는, 영혼 없는" 콩코드를 떠나 보스턴으로 이사했다. 그곳 서점에서 올컷은 "인간에 대한 대화 과정 - 그의 역사, 자원, 기대"라는 시리즈를 주최했고, 하버드 신학대학원에서도 가르쳤다. 

『작은 아씨들』은 아버지가 전쟁에 나간 뒤 4자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진=위키미디어

최근 “가족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작은 아씨들』의 집과 가족 찬양을 출판시장과 독서 대중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올컷의 가면 또는 강요된 타협으로 보는 시각이 제기되면서 작가의 진면목으로 재조명된 작품은 『일: 경험 이야기(Work: A Story of Experience, 1873)』이다. 그 작품에서 여주인공인 크리스티는 중산층 백인 여성들은 가정적이어야 한다는 당대의 이데올로기에 반대하여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삶을 살기 위해 공적 영역으로 들어가기를 열망한다. 

그러나 그녀가 가진 '일'의 개념 역시 『월든』에서의 소로의 그것처럼 모험적 기업가 정신이라는 백인 중산층의 남성적 일의 개념과는 다르다. 즉 당시 미국인의 주류 이데올로기인 경쟁적 개인주의(competitive individualism)에 반하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아버지 올컷이 추구한 것이었다. 아버지 올컷은 1888년 3월 4일 죽는다. 죽기 사흘 전에 찾아온 딸 올컷에게 아버지가 “나는 천당에 간다. 함께 가자”라고 하자 딸은 “그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답한다. 딸은 사흘 뒤에 죽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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