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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22] 조시아 웨렌, 노동판매자가 ‘노동 지폐’ 주는 세상을 꿈꾸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22] 조시아 웨렌, 노동판매자가 ‘노동 지폐’ 주는 세상을 꿈꾸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3.01.02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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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시아 워렌
조시아 워렌
조시아 워렌은 아나키스트를 자처하지 않았지만 고드윈과 푸르동과 함께 아나키즘의 3대 창시자로 꼽히고 있다. 사진=위키미디어

미국은 건국 후 중앙 정부에 대해 전통적 적대감을 갖는 많은 독창적인 아나키스트를 배출했다. 유럽의 개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개인주의자들은 경제 및 사회 질서를 가져올 수 있는 시장의 능력에 대한 애덤 스미스의 확신에서 영감을 얻었고, 변형된 형태의 자본주의가 아나키 상태를 초래할 것이라고 가정했다. 19세기 후반에 그들은 프루동의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그들의 아나키즘은 17세기와 18세기의 자립적인 정착민들이 형성한 미국의 독립성과 개성 존중에서 발전했다. 

최초의 진정한 미국 아나키스트는 음악가이자 수학자이며 발명가인 조시아 워렌(Josiah Warren, 1798-1874)이다. 그는 아나키스트를 자처하지 않았지만 고드윈, 프루동과 함께 아나키즘의 3대 창시자로 꼽히기도 한다. 그는 1798년생이니 1756년생인 고드윈보다는 42년 늦지만 프루동보다는 11년이나 빠르다. 그가 1833년에 발간한 최초의 아나키즘 정기 간행물인 <평화적 혁명가(Peaceful Revolutionist)>는 4페이지의 주간지였다. 그는 인쇄기를 만들고 활자를 주조하고 자신의 인쇄판을 만드는 인쇄업자였기에 그 주간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공유재산과 집단적 권위는 개인의 자발성을 억압한다

워렌은 최초의 퓨리턴 이주민의 자손으로 보스턴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보스턴에서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로 이사하고 음악교사이자 오케스트라 리더로 일했고 1821년에 수지를 태우는 램프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를 발명했다. 1825년에 워렌은 영국의 로버트 오언(Robert Owen, 1771~1858)이 제안한 유토피안 식민지인 뉴하모니(New Harmony)에 참여했으나, 1827년에 공유재산 배치와 집단적 권위의 시스템이 개인의 자발성과 책임을 막고 개성을 억압한다고 느껴 그곳을 떠났다. 

1826년 7월4일,로버트 오웬은 사적 소유,비합리적 종교,혼인제도로부터의 독립을 내용으로 하는 '정신의 독립선언'을 한 뒤 '뉴하모니'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건설했다. 사진은 로버트 오언이 구상한 '뉴하모니'의 모습이다

구성원들의 공동이익은 개인의 성격 및 상황과 직접적인 갈등을 유발해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요구와 자치체의 순응에 대한 요구를 조화시키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경험은 워렌으로 하여금 협동적 삶의 원칙을 거부하게 만든 것은 아니고, 오히려 사회가 개인의 필요에 적응해야 하며 그 반대가 아님을 알게 했다. 그는 이후 “사회는 모든 개인의 주권을 보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것은 인격과 이해관계의 모든 결합 및 연결, 그리고 기타 모든 약정을 피해야 하며, 이는 모든 개인이 항상 자유롭게 자신의 감정 또는 판단은 다른 사람이나 이해관계를 포함하지 않고 지시할 수 있다. 즉 모든 개인이 그들의 감정이나 판단은 다른 사람이나 이해관계를 개입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항상 자유롭게 자신의 신체, 시간 및 재산을 처분할 수 있도록 하지 않는 개인 및 이해관계의 모든 결합과 연결 및 모든 약정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공정한 상업(Equitable Commerce)』(1846)에서 더 나아가 각자가 옳고 그름에 대한 최종 판단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행위자가 동료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행동의 결과를 겪을 수 없는 사회를 옹호한 그는 불화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인위적 조직에 대한 모든 필요성을 피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개인'은 '본성적으로 그 자신에게 법칙'이며, 우리가 목표를 달성하더라도 이를 간과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동시대 사람들과 달리 그는 남성 못지않게 여성의 개성에 관심을 가졌다. 더욱이 그의 급진적인 개인주의는 사람들이 자신의 욕구를 정의하고 일한 대로 받는 자유주의적 자치체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방해하지 않았다. 

공정한 상업을 바랬던 ‘미국의 프루동’, 워렌

워렌은 자신의 원칙을 독립적으로 수행했지만 '미국의 프루동'으로 불렸다. 프루동과 마찬가지로 그는 재산을 인간 자유의 열쇠로 삼았다. 각 개인은 자신의 노동 산물에 대한 권리가 있지만 누구도 완전히 자급자족할 수는 없다. 기존의 생산형태는 분업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오언처럼, 노동 강도를 개인의 작업을 평가할 때 고려하고 노동 시간에 근거한 지폐를 교환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모든 상품이 생산 비용으로 교환되는 '공정한 상업'의 확립을 원했다. 따라서 그는 각 판매자가 자신의 노동 시간을 정확하게 계산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전통적인 화폐를 대체하는 '노동 지폐'를 제안했다. 

'노동지폐'의 모습. 사진=위키미디어

이러한 방식으로 이익과 이자가 근절되고 매우 평등한 질서가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한 워렌은 뉴하모니를 떠난 뒤 신시내티에 설립한 타임스토어(Time Store)에서 자신의 시스템을 시험했다. 그것은 3년 동안 지속되었고 그의 아이디어의 실용성을 보여주었다. 상품은 원가로 판매되었고 고객은 점주에게 노동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의 노동 시간에 상응하는 시간을 나타내는 노동 지폐를 주었다. 새로운 사상을 열심히 전파한 워렌은 1833년에 미국 최초의 아나키스트 잡지인 <평화 혁명>(The Peaceful Revolutionist)지를 발간할 수 있을 만큼 그의 특허(로터리 인쇄기를 위한 최초의 디자인을 포함)로 충분한 돈을 벌었다. 

또한 공정한 노동 교환에 근거한 모델 마을을 세웠다. 그는 그곳이 그런 자치체 중 최초의 것이기를 바랐다. 장기적으로 볼 때 그는 하루 2시간 노동이면 모든 생필품을 공급하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다음 실험은 오하이오 주에 세운 에쿼티 빌리지(Village of Equityin Ohio)였다. 여섯 가족이 토지를 구입하고 집을 짓고 협동 제재소를 설립했다. 자발적인 합의에 기초한 그곳은, 영국 혁명 동안 디거스(Diggers)가 조지힐 언덕(George 's Hill)에 설립하려고 시도한 이래 세계 최초로 세워진 아나키스트 커뮤니티였으나 불행히도 질병으로 무너졌다. 

조시아 워렌은 유토피아라는 또 다른 커뮤니티를 설립했다.  사진=위키미디어

그러나 그는 낙담하지 않았고 1846년에 즉시 주로 푸리에주의 자치체의 이전 구성원들로 구성된 유토피아(Utopia)라는 또 다른 커뮤니티를 설립했다. 채석장과 제재소를 기반으로 약 100명의 회원을 유치하여 1860년대까지 지속된 그곳은 처음에는 완전히 아나키즘적이고 자발적인 성격을 띠었다. 워렌은 1848년에 “모든 것이 거의 개인주의에 입각하여 진행되어 규칙을 만들기 위한 회의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조직도 없고 무기한 위임된 권한도 없다, '헌법'도 '법률'도 '규칙'도 없다. 공무원, 사제, 예언자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도 없다. 어떤 종류의 요구 사항도 없다”고 했다. 

모턴타임즈시  ’바보 같은 일을 할 수도 있는 권리‘

이어 워렌이 1850년에 롱아일랜드(Long Island)에 세운 ’모던타임즈시‘(City of Modern Times)라는 세 번째 커뮤니티는 10년 이상 유지되었다. 개인주의 원칙에 따라, 완고한 회원을 다루는 유일한 방법은 보이콧이었다. 어느 회원은 “불쾌한 자를 제거하기 위해 우리가 택한 유일한 방법은 그를 따돌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사지 않고, 팔지 않고, 그들과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에 대한 완전한 비간섭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우리는 그들이 여기에서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그들은 대개 자발적으로 가버린다.”고 했다.  

그곳 주민들은 현저한 상호 관용을 보였고 '바보 같은 일을 할 수도 있는 자유의 위대한 신성한 권리'에 충실했다. 워렌의 개인주의는 상호 이익을 위한 협력을 배제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는 공동 주방과 같은 것이 저렴하고 효율적이며 '가정의 여성을 돌이킬 수 없는 고된 일에서 구해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개인이 함께 살기를 선택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과 추구하는 것의 특성에 따라 조직된 '어린이를 위한 호텔'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유토피아’와 마찬가지로 ‘모던타임즈’는 붕괴되지 않고 오히려 상호주의적 성향을 지닌 보다 전통적인 마을로 발전했다. 워렌은 끝까지 일관성을 유지하여 완전한 종교의 자유('모든 사람이 자신의 교회')를 요구하고 '모든 사람은 자신의 나라'라고 하면서 개인의 절대적인 주권을 주장했다. 

모든 강제 제도가 폐지되고 자발적 계약 체제로 대체된 평등한 기회의 계급 없는 사회를 추구한 워렌은 '평등한 자유의 법칙'에 위배되는 계약을 시행하고 '평등한 자유의 법칙'에 대한 위반을 제재하기 위해 개별 사례를 처리하는 일반 규칙을 형성할 수 있는 자발적인 순환 배심원 배치를 옹호했다. 그는 공중의 질책, 투옥 및 사형을 가능한 제재로 간주했지만 '형벌은 그 자체로 불쾌한 것이며 더 큰 악을 막는 경우에도 악을 낳기 때문에, 사소한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 그것에 의존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했다.

라이샌더 스푸너는 "법의 이름으로 집행되는 강제적인 세금 징수 등 개인을 향한 정부의 폭력은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미국의 변호사이자 아나키스트이며 주요 사상 중 하나는 ‘강도국가론’이다. 사진=위키미디어
라이샌더 스푸너는 "법의 이름으로 집행되는 강제적인 세금 징수 등 개인을 향한 정부의 폭력은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미국의 변호사이자 아나키스트이며 주요 사상 중 하나는 ‘강도국가론’이다. 사진=위키미디어

워렌 이론의 실질적인 성공은 이론을 특히 매력적으로 만들었고, 계속해서 라이샌더 스푸너(Lysander Spooner)와 스티븐 펄 앤드류스(Stephen Pearl Andrews)와 같은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윌리엄 그린(William B. Greene)이 프루동의 상호주의를 미국에 소개했을 때 워렌은 그것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다. 심지어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도 워렌을 '놀라운 미국인'이라고 칭찬했다.

세부적으로는 많은 차이를 지적하면서도 자유주의의 일반적인 개념을 수용하고 워렌주의자들로부터 '개인의 주권'이라는 말을 차용했다고 인정했다. 밀은 또한 워렌의 자치체가 사회주의의 일부 측면과 피상적으로 유사하지만 '모든 개인에 대해 평등한 발전의 자유를 강제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사회에서 개인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반대했다'고 올바르게 지적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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