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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퍼스의 기호사상』 찬스 샌더스 퍼스 지음, 김성도 편역, 민음사, 333쪽, 2006
서평: 『퍼스의 기호사상』 찬스 샌더스 퍼스 지음, 김성도 편역, 민음사, 333쪽, 2006
  • 박일우 계명대 교수
  • 승인 2006.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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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의 나머지 반쪽을 찾아서

현대 인문학의 핵심인 데리다와 그레마스의 주저를 일찌감치 번역, 소개한 김성도 교수가 1999년의 '로고스에서 뮈토스까지'(한길사)와 2002년의 '구조에서 감성으로'(고려대학교 출판부)를 통해 소쉬르와 그레마스로 대변되는 프랑스 구조주의 기호학의 궤를 그린 후, 기호학 창시자의 하나인 퍼스의 탐색으로 이어질 것이란 예측은 기호학에 입문한 독자들이라면 가졌을 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성도 교수의 제법 충실한 독자라 자처하던 평자마저도 막상 '퍼스의 기호 사상'을 접하고는 놀라움과 당혹감을 같이 맛보게 된다.

놀라움은 무엇보다 이 책의 야심찬 기획 의도를 만난데서 나온다. 도대체 권당 300쪽이 훌쩍 넘는 8권의 '퍼스 선집'(Collected papers of Charles Sanders Peirce)을 어떻게 재구성할 생각을 했나 하는 것이다. 퍼스의 지평이 진화론적 형이상학, 선형대수, 논리대수, 현대 심리학, 기호학, 엘리자베스 시대 영어 발음의 권위에 이르는 판에, 더구나 '퍼스 선집' 자체가 편집 주제와 영역에서 일관성을 찾기 어려운 마당에 말이다. 이 거대한, 그러나 파편화된 텍스트에서부터 '퍼스의 기호론과 현상론 선집'이란 부제에 합당한 내용들을 재구성한 것은 전적으로 '로고스에서 뮈토스까지'의 저작과정에서 보여주었던 김성도 교수 특유의 문헌학적 방법의 결실이다.

'퍼스의 기호 사상'은 2부로 구성된다. 퍼스의 지적 발전이 칸트의 범주 이론을 수정하는 단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논리학을 대체하는 시기를 거쳐 새로운 기호 이론을 범주 이론과 결합하는 단계로 진행되어 갔음을 염두에 둘 때, 김성도 교수가 선택한 장절 구성 전략과 원문 단락 선택 전략은 기존의 '퍼스 선집'이 간과하였던 연대기적 측면을 보완할 뿐 아니라, 퍼스 기호학의 위상을 충분히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퍼스에 의하면 기호학은 논리학의 다른 이름이며 나타나는 것에 대한 형식적 과학, 즉 ‘현상학’의 일부이다. 이에 따라 2부에 해당하는 퍼스의 저작 부분에서는 ‘현상학’, ‘퍼스의 기호이론’, ‘감각론과 지각이론’이란 장 제목으로 '퍼스 선집'의 해당 단락들을 세심하게 찾아 옮기고, 이어 웰비 여사에게 보내는 세편의 서간문을 묶고, 부록에는 범주에서 기호이론으로 이어지는 퍼스의 기념비적 초기 논문을 수록하였다. 김성도 교수 특유의 상세하고 귀중한 서지 목록이 뒤따름은 물론이다.

평자의 당혹감은 제1부에서 나온다. 적지 않은 분량을 통해 15가지의 소제목으로 퍼스 사상의 지평을 해설한 이 부분에서 평자는 일반 독자들이 과연 이 글을 통해 퍼스의 사상적 지형을 편히 접할 수 있을까 강한 의심이 든다. 특히 퍼스 사상의 핵심이라 할 ‘현상학적 범주론’ 장에서는 편역자 자신이 밝힌 것처럼 들레달 교수의 목소리로 메워져, 같은 글 안에서도 이 부분은 특히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기호의 삼원적 분석’ 장은 널리 알려진 기호의 정의로 시작되는데, 원문의 "... in some respect or capacity ..."를 “일정한 관계나 어떤 명목 아래”로 옮겨 놓은데 이르러서는 구조주의 기호학에서 ‘관계’(rapport)’란 어휘에 주눅 든 독자들에게 엉뚱한 오독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을까 우려하게 된다. 이 부분은 ‘퍼스의 의미 이론’ 장에서 또 되풀이 되어 있다. 한편, 기호학의 보급과 교육에서 용어체계가 여전히 장애물임을 아는 터에, 특히 ‘기호 유형론’에서 쏟아져 나오는 한글 용어에 원어가 병기되어 있지 않아 이를 색인에서 찾아보아야 하는 부담을 독자들에게 전가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편역자의 해제가 또 다른 해제를 필요로 한다면 곤란하다. '퍼스의 기호 사상' 제1부 '퍼스 사상의 지평 및 기호학의 위상'은 좀 더 체계적이고 친절한 기술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자는 '퍼스의 기호 사상'이 이제야 제대로 된 기호학의 국내 수용과 발전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 믿는다. 흔히 기호학이란 답답한 구조로 세상을 읽고 닫힌 틀에 담론을 가둔다는 비난을 받아 왔다. ‘언어학적 구조’에 함몰된 기계적 방법이나 그레마스의 기호사각형 정도가 현재로서는 기호학이 독자에게 준 인상이다. 김성도 교수는 '로고스에서 뮈토스까지'에서 기호는 단지 인식론적 차원에서 닫혀 있을 뿐임을 ‘밤의 소쉬르’를 추적하여 밝혀내었고, '구조에서 감성으로'에서는 형식적인 분석 장치가 정념을 규명하는 인식론적 방법으로까지 발전됨을 힘써 강조하고 있다. 이 두 저서가 기호학의 한 축을 밝힌 것이라면 '퍼스의 기호 사상'은 또 다른 한 축,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 못한 또 하나의 기호학적 탐구의 장이 열렸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나왔을 법한 한 소제목, 이른바 ‘소쉬르와 퍼스’라는 내용이 없음은 김성도 교수의 겸손이며 숨겨둔 제안이다. 이제 국내의 기호학은 나머지 반쪽으로도 눈을 옮길 때란 뜻이다.

 

박일우 계명대 교수(기호학)

경북대에서 '픽토그램의 기호학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으로는 '문화와 기호-가상 강좌 운영의 한 사례', '플로슈 조형기호학의 변용에 관한 비판적 고찰' 등이 있고, 저서로는 '현대기호학의 발전(공저)', '이미지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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