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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화된 求道者的 서사에 넘쳐나는 찬양
신비화된 求道者的 서사에 넘쳐나는 찬양
  • 최장순 기자
  • 승인 2006.06.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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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한국 평단의 박상륭 콤플렉스: (2)박상륭 연구의 문제점

한국 평단에서 박상륭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높이를 가늠할 수도 없는 빽빽한 형이상학의 봉우리’(김진수), ‘들어갈수록 더욱 깊이를 알 수 없는 밀림’(김정란), ‘1960년대의 가장 주목되어야 할 한 소설적 성취’(임우기), ‘엄청난 깊이의 용광로에서 쏟아져 나오는 들끓는 상상력의 분출’(서정기). 박상륭에게 뿌려진 이러한 형용어구들은 박상륭 문학이 서 있는 지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문학에 대한 일방적 찬사와 외경의 표현들만 난무하는 현실을 볼 때, 그의 문학은 여전히 어정쩡한 자리에 앉아 ‘잡소리’[1] 說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지금까지 박상륭 문학 연구 실적은 단행본 10여권, 학위논문 17편(박사 4편), 학술논문 50여건이 전부. 박상륭과 동시대 작가인 최인훈(단행본 40여권, 학위논문 194편, 학술논문 3백23건)이나, 이청준(단행본 30여권, 학위논문 1백38편, 학술논문 2백19건)의 경우를 살펴본다면, 박상륭은 평단에서 다루기 어려운 작가로 그간 기피돼 왔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박상륭 소설에서 비판의 혐의가 발견돼도, 비판적 평론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

박상륭 소설의 주요한 특질을 ‘난해성’으로 요약하는 평단의 시각 때문인지 아직도 비평을 위한 기초작업이 결여돼 있으며, 세련된 비판도 부재하는 실정이다. 최근의 연구는 박상륭 소설에 대한 주제적 접근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문체, 서사구조, 담론의 양상 등 미학적 측면에 대한 접근은 대부분 인상비평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한국 평단, 박상륭에 대해선 언제나 ‘불완전한 시론’

‘박상륭 어휘사전’(푸른사상 刊)을 펴낼 정도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임금복은 “현재 한국평단은 박상륭의 문학을 이해하는 정도여서 비판은 조급한 것 같다”고 전한다. 그는 “아직도 박상륭의 재물적이며 악마적인 문체, 그의 우주적 담론에 대한 평단의 연구가 부족하다”며 “나는 겨우 10% 이해한 수준”이라고 겸손을 표했다.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평론가마저도 10% 이해 수준에 머물러 있는 이 상황은 박상륭 문학에 대한 올바른 배려도 아니요, 그를 이해하려는 많은 독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박상륭 그만의 독특한 만연체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說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修辭의 난해함 때문인지, 대부분의 박상륭 연구자들은 자신의 비평이 ‘불완전한 시론’이라고 자청하고 있으며, 이렇듯 한 풀 꺾인 평론들은 박상륭 문학의 신비화를 더욱 조장하고 있다.

박상륭 문학에 대한 신비화는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다. 문학평론가 송영순은 “산을 오르지 않고도 그 산의 웅대함을 보고 감동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태도는 문학 비평의 필요성 자체를 무마시키는 위험한 발언이다. 게다가 그는 “박상륭은 문학 안에 가두어서 문학성을 검증받기에는 너무나 광대한 무대를 가지고 있다”고 언급함으로써, 평단의 무능력과 몰이해를 두둔하고 나섰다.

박상륭에 대한 비판적 독법을 유지하려는 문학평론가 김명신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박상륭 소설의 난해함을 전제하고 분석에 들어가 소설에 대한 본격적이고도 객관적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박상륭 소설 연구’). 신비화를 조장하는 ‘객관적 평가의 부재’가 40여 년 동안 지속됐다면, 이는 곧 평단의 ‘직무유기’에 해당하리라.

박상륭 문학의 최대 성과를 ‘죽음의 한 연구’로 꼽는 한용환 동국대 교수는 “그의 문학은 독창적인 문체를 갖추고 있으며 비평가나 연구자의 해석이 중재돼야만 독자의 해석이 가능한 심층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전한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그의 문학은 독자와 동떨어져 문학 연구에만 기여하게 된다”는 것. 하지만, 문학 연구마저도 활성화돼 있지 않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독자와 동떨어진 문학 연구가 “전대의 문학적 관행이나 문단적 상황과의 연계하에서 이뤄짐으로써 작품 내적 문제보다도 문단 내 지식권력의 문제로 전이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박상륭 문학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독자들을 통해서 이뤄진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평단의 직무유기 “이유 있다”

평단에 제기될 법한 이러한 직무유기에 대해, 임금복은 “그의 문학이 당시 주류를 이뤘던 민중 리얼리즘 계열의 문학과 판이하게 달라 평단의 관심 밖에 위치했던 데다가, 그 거대한 담론을 소화할 수 없는 평단의 한계가 박상륭 문학 연구를 더욱 빈곤하게 했다”고 전한다.

또한, 문학평론가 임우기 역시 ‘문학동네’에서 변명을 늘어놓았다(‘죽음의 현실과 생명성에의 희원 1’). 박상륭 소설에서 외견상 풍기는 “비합리적인 신비주의적 분위기가 실용주의적·합리주의적 가치 척도가 지배적인 당시의 지적 풍토에서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비평의 대상에서 제외돼 왔다는 것.

이렇게 박상륭 문학에서 알리바이를 발견한 그는 ‘열명길’에서 샤머니즘적 세계관을 발견한다. 박상륭은 샤머니즘적 세계관을 통해 “생명이 삼라만상의 조화 속에” 있음을 알리지만 서구의 이원론적 사고방식이 내포한 반생명성을 묘파함으로써, “서구 문화의 물밀듯한 유입에 의해 정신적 혼란을 겪어야 했던 한국 현대사의 축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 바로 임우기의 분석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은 이전 논의의 확대·재생산에 지나지 않는다. 1970년대에 이미 故 김현은 박상륭의 작품이 “샤머니즘적인 것을 소재로 택하면서도 가령 김동리의 ‘무녀도’와 같이 샤머니즘의 세계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객관적으로, 논리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그 세계의 의미와 한계를” 드러내보였다고 평했다. 김현은 이를 통해 박상륭의 작품을 ‘샤머니즘의 논리화’로 특징지은 바 있다(‘세 개의 산문’).

동일한 화두의 재생산은 우남득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는 암호화된 박상륭의 소설 속에서 기호들을 도출한 후, 구조적 분석을 통해 ‘요나 콤플렉스의 원형성’을 파악했다(‘박상륭 소설의 물질 상상력의 체계’). 작품에 대한 인상비평만이 난무하던 때, 이러한 분석은 시선을 집중시켰으나, 이 역시 김현(‘요나컴플렉스의 한 표현’)이 던진 화두에 구조주의적 분석틀을 가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 약점이 있다.

한마디로 “허무주의와 샤머니즘의 극복이라는 주제”는 “한국인의 상상 체계에 접근해나가려고 애를 쓴” 김현 자신의 화두였는데, 후대 연구자들은 이러한 문제의식의 적법성을 따져보지도 않고 그대로 모방·답습하고 있는 실정. 이처럼, 박상륭 문학 연구는 아직도 60~70년대 평단의 그늘 속에 머물러 있다.

박상륭의 철학적 사유에 대한 비판적 검토 부재

박상륭은 기호학과 접속하는 體用論, 탄트라, 우파니샤드, 임제록, 영지주의, 융, 엘리아데, 니체 등 온갖 종류의 사상을 토대로 죽음에 관한 사유를 종횡무진 전개하고 있다. 독자는 무차별하게 인용되는 잡다한 사상들을 통해 드러나는 그 박학다식함에 고개를 숙이거나, 지나친 현학성에 철학적 물음표를 붙일 수 있다.

문학평론가 김정란은 “박상륭의 사상적 맥락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개척해낸 내면성의 지평”이라며 “그것은 근대적 세계 앞에 홀로 선 개인 내면의 확보 문제”라고 말했다. 박상륭은 명민한 자아의식을 통한 ‘도닦이’로서 글쓰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종교나 샤머니즘을 넘어선 새로운 ‘원형’을 탐색하고 있다는 것. ‘각설이’ 연작이나, ‘죽음의 한 연구’, ‘칠조어론’ 등은 일인칭 화자(주인공)의 자기 고백적 문장들을 선보이고 있으며, 그 안에서 형상화되는 인물의 구도적 여정은 박상륭 자신의 문학적 지향(구원에의 열망, 인류의 원형 탐구)을 드러내 보인다는 지적이다.

진형준 역시 “나무 둥지와 잎은 어떻게 자기의 보이지 않는 뿌리를 인식할 수 있을까, 지렁이는 땅 속으로 기어들면 자기의 실체를 어떻게 수긍할 수 있을까?”(‘2월 30일’)라는 박상륭의 글귀에 주목하면서, 익명성으로 함몰된 개인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욕구”를 엿보고 있다. 이처럼, 한국 평단은 자아를 발견하고 극복해나가는 박상륭식의 구도적 서사에 집중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문학평론가는 “철학적 사상과의 일치 여부가 소설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또, 정현기 연세대 교수는 “박상륭의 글이 담아내는 律調性 자체가 삶에 대한 애정, 아픔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 아픔의 궁극형식이 죽음”이라며 “박상륭의 사상에 대해 철학적으로 운운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못 박았다.

이처럼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박상륭 사상의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그보다 내면적 태도가 더욱 중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그의 문학이 철학적 개념의 무수한 차용을 통해 형이상학적 소설의 준령을 확보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가 빽빽한 개념의 숲을 지나 봉우리를 형성한 것은 사실이되, 그 과정을 검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평단의 인식. 딜레마다.

박상륭. 그의 문학이 문체적 측면이나 사상적 측면에 있어 독보적 영역을 구축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문학에 대한 작품론은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찬양일변도의 작가론만 난무하는 것이 평단의 서글픈 현실이다. 그의 문학을 전격 해부하는 작업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여전히 그의 글쓰기는 ‘만인을 위한, 그리고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문학으로 남게 될 것이다. 

최장순 기자 ch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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