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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 ‘한국 평단의 박상륭 콤플렉스’
특집_ ‘한국 평단의 박상륭 콤플렉스’
  • 김명신 시카고대
  • 승인 2006.06.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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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상륭 문학의 특성과 한계-과도한 종교적 욕망과 讀者의 절망

박상륭에 대한 경외감과 숭배의 표현에 한국 평단은 입에 침이 마를 정도다. 박상륭이 하나의 교단을 차리기라도 한 듯, 소수의 마니아들의 박상륭 사랑은 대단하다. 하지만, 그의 문학에는 독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곤 한다. ‘난해성’으로 특징지어지는 그의 글쓰기를 꼬집는 말이다. 그의 문학이 어렵기 때문인지 면밀한 작품론이 부재한 가운데 찬양일변도의 작가론이 난무하는 평단의 모습.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이에 교수신문은 박상륭 문학에 대한 비판적 제언을 제시하고, 그의 문학을 연구하는 평단의 모습을 일별함으로써, 일방적 박상륭 예찬론의 문제점을 짚어보고자 했다. / 편집자주

박상륭이 던지는 문학적 화두는 늘 파격적이고 문제적이다. 그러나, 정작 그의 소설과 그의 이름에 ‘난해함’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 본격적 계기는 역시 4권으로 완성된 ‘七祖語論’(1990-1994)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의 글쓰기의 정신적 기원은 1960년대의 단편소설들에서부터 연원하여, 1975년 출간된 ‘죽음의 한 연구’에서 한국 서사문학의 한 품격을 보여주면서 본격적으로 구조화되고 있지만, ‘칠조어론’만큼 박상륭 문학세계의 여러 특질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도 없다. 

‘죽음의 한 연구’가 禪宗의 6조인 혜능을 근간으로 소설적으로 재현해냈다면, ‘칠조어론’은 거기에서 선회하여 神秀적 사유 위에 7조라는 가상계보의 인물을 재현해내고 있다. 허나 판단컨대, 보다 중요한 차이는 서사화 방식에서 작가와 작중인물인 話者와의 관계 양상의 변모에서 찾을 수 있다. 소설을 뛰어넘는 종교적 어록으로 묘파해낸 ‘칠조어론’과 그 정신세계의 창시자로서의 작가 자신은 주인공 7조와 분리되지 않는 동일한 인물이다.

‘죽음의 한 연구’가 뛰어난 문체미학과 충격적 서사구조 안에서 주인공 6조가 되고자 하는 작가의 욕망을 억누르고 있는 것과 달리, ‘칠조어론’은 인물 7조가 되고자 하는 작가의 욕망이 직접적으로 투영되어 있다. 이 점이 박상륭 문학의 한 분기점이자, 박상륭 문학의 종교적 지향성과 ‘칠조어론’의 독특한 세계를 결정적으로 규정짓게 하는 근간이 된다. 경전과 방불한 서사구조와 독해의 불능으로까지 이끄는 난해성 등, 독자들이 작품을 멀리하게 한 결정적 원인은 이러한 문학세계의  지향점과 연관되며, 박상륭 문학에 대한 경외감과 거부감이라는 극단적인 반응을 동시에 야기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 연원한다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칠조어론’이 ‘죽음의 한 연구’이후 17년여만에 발표된 것을 우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 10만장을 목표로 쓰기 시작했다가 2만 5000여장을 집필했고 상당부분이 작품에서 제외되었다는 작가의 증언을 고려했을 때, 이는 두 작품간의 긴 시간적 거리에 상응할 만한 어떤 작가적 고민과 내적 분열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요컨대, 작가 박상륭과 주인공 7조사이의 객관적 거리와의 싸움이다. 이 작가와 작품화자간의 ‘객관적 거리두기’의 문제는 곧 ‘죽음의 한 연구’와 ‘칠조어론’이란 두 작품간의 근본적 차이이기도 한데, 이 차이가 ‘칠조어론’을 ‘소설’로서가 아닌 ‘經傳’의 반열에 올리고자 한 박상륭 자신의 소설에 대한 인식 변화와 맞물려 있다.


나는 아직도 박상륭이 7조라고 명명된, 작품의 실제적 인물이 되고자 하는 자기 안의 욕망과의 싸움을 하고 있다고 보며, 이 거리 사이의 어떤 지점에서 박상륭은 때론 ‘에세이’로, ‘소설’로, 혹은 ‘雜說’이라는 형식으로 자기와의 타협을 한다고 본다. 이것은 자아와의 극심한 싸움을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장돌뱅이 각설이에 불과했던 초기 소설들의 작중인물들이 ‘죽음의 한 연구’를 필두로 구도자로 변신해나가면서, 인물과 더불어 작가 자신이 깊은 내적 변화를 겪게 되는데, 비범한 예외적 영웅형으로의 변모 및 이에 따른 인물과 화자를 동일시하는데서 오는 작가적 정체성의 문제로 인해, 이들간의 관계 정립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임은 충분히 추론된다. 이런 점에서 그가 폐기해버린 나머지 원고의 내용들이 주로 무엇이었는가도 매우 중요하다. ‘칠조어론’에서 작가 자신이 작중인물인 7조로 직접 나서게 된 것은, 求道행으로서의 글쓰기를 해온 작가가, 인물과 작가 자신과의 간격을 좁혀나가면서 급기야 자신의 글쓰기와 글쓰기의 주술적 힘과 마력에 압도된 것이나 아닌가 한다.


박상륭은 소설 안에서 진리가 하나라는 명제를 논증해나가고자 한다. 이런 연유로 그의 사유방식은 매우 연역적이다. 모든 사유와 철학체계를 아우를 수 있는 전일적 사유의 추출을 위해, 그는 그것들을 정통적 사유에서 벗어나 주관적으로 변형시켜 수용한다. 體用論이나 易學, 구조주의 언어학, 니체 철학 등에 대한 이해는 박상륭식으로 탈바꿈되고 변형되어 수용된다. 이러한 ‘보편적 법칙’의 추출에의 욕망은 도식성과 환원주의에 빠지게 하는 주 요인이 된다.

박상륭 사유의 결합력과 혼합주의가 갖는 놀라운 통일성과, 그의 명쾌한 소설적 해답에 동의하다가도 때로 혼란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전일적 사유를 무리하게 추구하다가 기인된 것으로 이러한 해결되지 못한 상충과 모순이 그의 작품 안에 존재해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서구의 기호학과 동양적 사유의 핵인 체용론의 접합이 그것이다. 그는 ‘칠조어론’에서 자신의 가장 큰 테마인 이원론을 극복하려고 했음에도, 결국은 기호학의 이원적 체계 안에 고착화시킴으로써 자기모순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사물의 인식방법인 체용론의 전개에서 ‘體’性과 ‘用’性의 상호 전화라는 끊임없는 변환의 易을 보여주지 못하고 ‘體’를 매우 단순화시켜 벗어나야할 ‘獸皮’이자 ‘無明’으로 치환시키는 것이나, 기표와 기의에 대한 기호학의 이원론적 체계에 의거하여 무수한 은유의 연쇄고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 그리고 기표나 기의로 분류된 것들 각각이 서로 등식의 관계를 이룬다고 보는 것은 도식성과 환원주의의 예이다.


이 보편적 법칙의 추출이라는 명제는 그가 전일적 사유를 추구하는 동시에 동서고금의 모든 사유체계를 극복의 대상으로 삼고 넘어서기를 시도한다는 것과 관련된다. 고전적 저작물들과 철학자 및 이른바 성현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그의 비판의 칼날에 서있다. 그는 그들 사유의 한계를 지적하고 여기로부터 자신의 철학적 물음을 제기하면서 자신의 입론을 전개해나간다.

이미 부동의 평가를 받았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신랄하고도 혹독한 비판적 물음을 던지는 과감성은 때론 돈키호테적이기까지 하다. 노자의 ‘無’나 기독교의 삼위일체설, 용수의 中觀思想 비판 등이 바로 그것인데, 기표에서 기표로의 무수한 ‘미끄러짐’과 전이, 기표의 다른 기표로의 대체와 대체가능성은 곧 그의 사유에도 적용될 수 있다. 제 사유의 연관관계를 무수한 은유의 연쇄적 등식의 고리들로 도식화시킬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모든 사유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자신감은 어떻게 가능한 것이었을까. 자신의 소설을 소설 아닌 소설로서, 소설보다 높은 단계의 종교적 영역에 위치짓고 싶게 하는 이 모순된 욕망이 그의 소설의 토대이자 추동력이 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불교, 도가, 니체 철학 등을 종횡무진하는 그의 방대하고도 놀라운 지식의 양과 사유의 깊이,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사유 틀로 꿰어놓을 수 있는 이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한계와 오류에 대한 그의 지적 역시 ‘박상륭적’ 이해의 산물이며, 우리는 일단 그의 작품을 소설로서 간주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고전적 저작물들에 대해 박상륭이 내린 해석에 대한 객관적 규명 작업, 예컨대 ‘칠조어론’ 이후 작품에서 보이는 니체 철학에 대한 이해 같은 것은 앞으로 이뤄져야할 과제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니체든 석가모니든, 노자든 나는 작가 박상륭이 이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아무래도 나는 禪의 가상계보를 잇는 7조와 같은 존재로서의 박상륭보다는 철저히 작가 박상륭을 원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영역으로 나가고자 할 때 작가는 교조화될 수 있으며, 독자들에게 전이되는 작품의 깊은 감동은 경감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죽음의 한 연구’의 6조가 보여준 깊은 고뇌와 비극적 사랑에서 오는 슬픔과 페이소스를 ‘칠조어론’에서는 느낄 수 없다. 그저 완전한 한 神人을 보게 된다. 사유의 제 연관관계를 추적하며 소설적 재현을 시도하는 방식은 신비하며 매우 현학적이다.

동서고금의 제 철학사상과 종교에 대한 식견 및 그것을 다루는 방식은 독자를 주눅들게 하며, 그가 사용하는 전혀 생소한 어휘들과 숱한 인공어들, 온갖 언어의 박람장 같은 문장은 독자들을 절망하게 만든다. 난공불락 같은 거대한 분량의 작품 앞에서 시도조차 버거워하는 오늘날의 독자층에게, 독자로서의 최소한의 인내와 수용의 자세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인가. 여기서 독자와의 소통 방식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소통의 길 역시 이 시대의 진지한 독자들이 함께 열어나가야 할, 우리 모두의 책무이기도 하다.


‘칠조어론’을 대표작으로 하여 있을 수 있는 그에 대한 비판과 지적들은, 그의 작품이 예술이 아닌 종교 차원으로 구조화되었을 때 배태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는 ‘칠조어론’에서 예술과 종교의 정의를 내리면서, 종교만이 인간을 더 높은 세계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기술한다.


이 점이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소설이라는 예술적 영역이 아닌, 종교적 영역의 경전 반열에 올리려한 이유일 것이다. 어찌하여 박상륭은 이러한 종교적 탐색에 이렇게도 깊이 몰입하게 된 것일까? 이런 종교적 세계에 대한 천착은 ‘앎’을 통한 깨달음과 구원을 자신의 세계관으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구원의 길에 대한 탐색이 끝나지 않는 한 그는 설령 그의 소설에 거부감을 갖거나 싫증낸 독자대중이 아무리 외면한다 하더라도 계속하여 자신의 사유의 결과물을 글로 쓰게 될 것이며, 우리는 다음의 그의 소설을 긴장하며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길이 얼마나 고달프고 외로울 것인가? 그의 ‘두 집 사이’ 연작의 ‘늙은 아해’가 말한다. 너무 외롭다. 너무 외롭다고.

김명신 / 시카고대 Post-Doc 연구원·국문학

필자는 연세대에서 '박상륭 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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