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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51] 믿음이 필요한 때
[한민의 문화등반 51] 믿음이 필요한 때
  • 한민
  • 승인 2022.12.28 08: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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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51

 

한민 문화심리학자

손흥민이 일곱 명의 수비수들 사이에서 황희찬에게 찔러준 패스는 한국을 극적으로 16강에 진출시켰다. 드라마틱한 역전승과 16강 진출에 기뻐하던 한국인들은 곧 불행회로를 작동시킨다. 손흥민 은퇴하면 한국 축구는 어쩌냐. 한국에 다시 손흥민 같은 천재가 나타날 수 있을까. 불행회로란 세상 일이 항상 불행한 방향으로 진행될 거라는 인지적 오류를 일컫는 인터넷 은어다. 

한국인들의 불행회로는 역사가 깊다. 사람들은 한국 축구를 월드컵 4강에 진출시켰던 2002년 세대가 은퇴하면 한국 축구는 다시 암흑기를 맞을 거라 생각했다. 해외 축구선수의 아버지, 박지성 이후로는 다시 세계적인 클럽에서 뛰는 한국 선수는 나오지 않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세계 최고의 리그 득점왕을 보유하고 있다. 

사람들은 피겨 여제 김연아가 은퇴하면 한국 피겨에는 다시 포디움에 서는 한국 선수는 없을 거라며 슬퍼했다. 그러나 올해 11월 김예림 선수가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며 김연아의 뒤를 잇고 있다. 올림픽에서 한국 수영에 첫 금메달을 안겨준 박태환이 은퇴하면 한국 수영에서는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황선우 선수가 세계대회에서 연거푸 우승하며 한국 수영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빙속 여신 이상화 다음에는 김민선이 그 뒤를 따랐고 바람의 아들 이종범은 갔지만 그 아들 바람의 손자 이정후가 나타났다. 손흥민도 언젠가는 은퇴하겠지만 그 뒤를 이을 선수는 분명 나타날 것이다. 박세리 이후 계속되는 한국 골프의 강세나 손꼽을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레전드들이 살아있는 양궁이나 숏트트랙이 그 증거다.

스포츠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클래식 콩쿠르에서 한국인들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이고 빌보드와 아카데미, 심지어 문학에서도 한국 작품과 예술인들의 수상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경제 부문에서의 전통적인 활약은 이미 관심의 대상조차 아니다. 사람들은  이 작은 나라에서 어찌 그렇게 천재들이 연달아 나오느냐고 감탄하지만 이 말은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한국 정도 되는 규모의 나라가 몇몇 개인의 힘으로 움직여간다는 믿음은 환상이다. 그 아래에는 시스템이 있다. 여러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성과가 나오고 있다는 말은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물론 부족한 점도 있고 아쉬운 점도 많지만 시스템이 있고 그것이 돌아간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손흥민 은퇴를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손흥민이 은퇴하면 다시는 손흥민의 플레이는 볼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손흥민이 은퇴한다고 해서 한국 축구가 끝날 것처럼 우울해 할 필요는 없다. 세계 3차 대전이나 지구 자전축의 변동 같은 일이 없다면 한국에서 축구는 계속될 것이고 축구가 계속되는 한 손흥민의 뒤를 이을 선수는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우리는 항상 행복하길 원하지만 즐겁고 행복한 날이 매일같이 계속되어야 행복은 아니다. 살다 보면 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나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좋은 일이 생겼는데 그 일을 즐기지 못하고 좋은 일이 지나간 다음에 다시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을 걱정하는 사람은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다. 

이때 필요한 능력이 자기탄력성이다. 자기탄력성은 실패와 좌절에도 다시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회복력을 의미한다. 자기탄력성은 자존감에서 비롯된다. 내가 능력이 있고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실패와 좌절에 굴복하지 않고 다시 일어난다. 경제구조의 변화, 고용불안, 국제정세, 기후변화, 팬데믹.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 믿음이다.

물론 우리가 한국인이니까 할 수 있다는 식의 믿음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믿음은 지식인 여러분께서 수없이 경계해 온 자기중심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우리의 경험이다. 한국인들은 수 없는 도전 속에서 수많은 성취와 실패를 반복해 왔다.

때로는 잘못된 선택도 있었지만 우리는 꾸준히 나아져 왔다. 한국인들은 적어도 더 나아지려는 욕망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 글은 스포츠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 스포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문화라는 산을 오르는 등반가. 문화와 마음에 관한 모든 주제를 읽고 쓴다. 고려대에서 사회및문화심리학 박사를 했다. 우송대 교양교육원 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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