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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국가를 위해 사상과 진영을 넘어서다
자립국가를 위해 사상과 진영을 넘어서다
  • 양준석
  • 승인 2022.12.30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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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역사로 본 21세기 공공리더십 ㊶_우남 이승만
이승만은 자강과 독립을 위해서 자유가 중심이 되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국가건설의 모델로 삼았다. 사진=위키백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1875-1965)에 대해서는 ‘국부’로 추앙하거나 ‘독부’로 폄훼하는 상반된 평가와 시선이 한국사회에 존재한다. 하지만 모든 사물이 다면으로 구성돼 있듯, 인물에 대한 정의가 단면에 그칠 수 없다.

또한 이승만에 대한 연구와 평가에 있어서 소수의 자료들이 반복적으로 인용되고 있는 측면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승만이 직접 저술한 글을 토대로 “있었던 그대로” 이승만이 견지했던 리더십의 근간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승만은 한성감옥 수감 시기(1899-1904) 이미 서구 민주주의의 구체적 구조를 파악하고 있었다. 1914년 2월 『태평양잡지』에서는 미국의 헌법이 기초가 되는 국가를 그려내고 있다. 이승만에 있어서 서구, 특히 미국식 민주주의는 자강과 독립을 위한 구체적 선진 운영시스템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이승만에 대한 많은 오해 중 하나는 그가 처음부터 ‘냉혹한 반공 투사’였을 것이라는 인식이다. 하지만 이승만은 일제시기 독립운동의 전략으로 소련·공산주의와 협력을 모색하기도 했다.

대한제국기부터 이승만은 러시아의 야욕을 경계하는 공로 인식을 견지했으나, 1923년 “공산당의 당부당”에서 공산주의의 합당한 부분으로서 ‘인민의 평등주의’를 꼽았고, 사상적 대립보다 민족의 단결을 우선했다.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대통령으로서 소련에 대표단을 파견하기도 했고, 1933년 그가 소련 입국 직후 추방된 상황에서 주변에 추방 사실을 알리지 말기를 당부했다. 이승만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민족의 자강과 독립을 위한 기반으로 세웠지만, 동시에 공산주의와 협력도 모색한 측면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이승만은 공산주의 경제정책의 장점을 짚기도 했지만, 동유럽에서의 공산화와 국내 공산세력의 유사성을 확인하며, 강한 반공으로 선회한다. 1948년 제주4.3사건, 국군14연대반란사건, 1949년 중국 공산화를 겪으며, 이승만의 공산주의와의 비타협적 입장은 더욱 강화된다.

공산세력의 위협 강화는 이승만에게 대미 군사원조를 더욱 절실하게 했다. 이승만은 유럽에서 미국이 소련에 대한 군사봉쇄의 일환으로 조직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사한 태평양동맹을 주창했으나 미국은 참가를 거절했다.

이에 이승만은 한국 진해에서 1949년 8월 장개석과 태평양동맹 결성 요청 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한국의 자립적 반공체제 구축을 염두에 둔 전략이었다. 

이승만의 국가건설을 위한 반공과 자립정책은 미국과 마찰을 빚었다. 6.25전쟁 발발 후 미국의 한국에 대한 원조는 막대했으나, 한국의 부흥 지향 정책 대 미국의 안정 지향 정책은 대립했다. 한국은 비료공장 등 사회생산 기반을 구축할 생산재 지원을 요청했지만, 미국은 민생문제 안정을 위한 소비재 중심의 지원을 결정했다.

또한 이승만은 원조물자 분배에 대한 한국의 결정권 없음을 비판하며, “우리와 관계없는 물품을 가져온다면 그 원조를 받지 않겠다”라고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은 “이승만은 너무나 불만스러운 동맹이며, 가장 심한말로 비난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기록했다.

미국은 한국에 가장 강력한 동맹국이자 지원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자립국가건설 구상은 미국의 계획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른 마찰은 피할 수 없었다.

1948년 5.14 단전사태로 에너지문제를 절감했던 이승만은 1958년 원자력법을 제정했으며, 1959년 시험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2(Triga Mark II)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러한 자립적 산업기반의 구축은 이후 한국 사회발전의 토대가 됐던 것이다.

이승만은 자강과 독립을 위해서 자유가 중심이 되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국가건설의 모델로 삼았다. 이러한 목표는 해방된 한국과 제1공화국 시기에도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민족과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사상적으로 대치상태였던 공산주의와도 협력할 수도, 한국의 가장 강력한 지원국인 미국과 대립할 수도 있었다.

현재의 이승만 연구는 극단에 위치해 있다. 이승만과 관계된 원자료들을 적극 활용해 정형화된 이승만 연구에서 벗어나, 그의 다층적인 인식, 사상, 정책에 대해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양준석 국민대 교양대학 교수·한국국제정치사

연세대에서 국제정치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연구이사, 한국정치학회 이사, 한국국제정치학회 대외협력위원회 간사로 활동 중이다. 대표 저술로는 『해방공간과 기독교』 (2017, 공저), 『대한민국 국무회의록 1958』 (2018, 공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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