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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했던 청년, 종교 넘어 독립운동을 이끌다
가난했던 청년, 종교 넘어 독립운동을 이끌다
  • 남기택
  • 승인 2022.12.22 08: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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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역사로 본 21세기 공공리더십 ㊵_만해 한용운
만해 한용운의 서대문 형무소 수형기록카드이다. 사진=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일운동 직후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한용운(1879∼1944)은 수감자용 프로필 사진을 찍어야 했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시선은 정면 오른쪽을 향했다. 빡빡머리에 피골만 앙상한 얼굴이 영 볼품없는 인상이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왼쪽 입꼬리가 약간 올라간 모양이 누군가를 비웃는 듯 보인다. 그보다도 형형한 눈빛이 어떤 결의처럼 강렬한 전언을 함의하고 있다. 그렇게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 광채는 흐린 흑백 이미지 속에서도 선명히 빛났다.

한국사에 길이 남을 저 처연한 사진을 기록하기 40년 전 충남 홍성의 어느 시골, 몰락한 잔반 가계에서 한용운은 태어났다.

현대사의 비극이 여명처럼 한반도를 잠식하던 구한말, 한용운은 비록 가난하지만 의협심 강한 청년으로 자랐다. 21세에 무작정 길을 나서 강원도 인제 등지를 전전했고, 27세에 다시 백담사를 찾아 수계를 받고 본격적인 불자의 길을 걸었다.

비상했던 인물 한용운은 불심도 깊어 개혁의 기치를 들고 40세가 되던 1918년 월간지 『유심』을 창간했다. 종교와 문화와 현실의 지평을 꿰뚫는 선각자적 실천이었다.

운명의 1919년, 한용운은 손병희나 이승훈 등과 함께 삼일운동을 기획하고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 및 공약삼장을 추가했다고 알려져 있다. 투옥 후에는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에게 제출할 대변서로 「조선독립의 서」를 작성했다.

출옥 후에도 한용운은 신간회 발기 등의 독립운동과 불교 대중화에 헌신했다. 1929년에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전국적 확장을 위해 서울 민중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재수감되기도 했다.

그렇게 조국과 민족, 불교와 문화를 위해 일생을 바친 그는 해방을 한 해 앞두고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했다.

현대를 사는 한국인이라면 가끔 이런 질문을 품는다. 과연 우리에게 존경할 만한 지도자가 있는가? 대통령에게조차 매일 원색적 비난이 쏟아지는 소위 디지털 민주화의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현상은 결코 지금 당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현대사를 되돌아보면 보수와 진보를 떠나 대부분 위정자들에 대한 불신이 점철됐다. 그 원인은 일제 강점과 분단이라는 선험적 배경 위에서 집적돼 왔다.

20세기 지도자가 21세기의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만해 문학에 담긴 세계적 지평에 주목해야 한다. 일찍이 아시아권 문학장에서 내셔널리즘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전 세계 담론장에 공고화한 사람은 타고르였다.

그가 1913년 『기탄잘리』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건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26년 간행된 『님의 침묵』 속의 한 편인 「타고르의 시(GARDENISTO)를 읽고」는 “벗이여 부끄럽습니다 나는 그대의 노래를 들을 때에 어떻게 부끄럽고 떨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나의 님을 떠나서 홀로 그 노래를 듣는 까닭입니다”라고 노래했다. 한용운 시는 우리의 문학이 곧 세계적 담론체로서의 그것이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그는 타고르식 담시 혹은 선시의 가능성을 한국 문학장 속에 정착시켰다. 또한 『님의 침묵』은 타고르의 비의적 주술이 지니는 추상성에 대한 비판적 전유이기도 하다. 이를 대변하는 정서가 위 작품을 관류하고 있는 화자의 부끄러움일 것이다.

한용운은 문화의 세계적 지평을 간구하는 동시에 민족의 대립과 반목을 넘어서는 실천적 리더십의 소유자였다. 이 글 모두에서 수형기록카드 속 한용운의 고개가 삐딱하다고 묘사했다. 그건 의도적 포즈가 아니었다.

한용운은 을사늑약 이듬해에 더 넓은 세계를 보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를 답사한다. 이때 친일 단체 일진회 회원으로 오인 받아 조선 청년들과 생사를 건 격투를 벌였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독립운동 관련 지역을 돌아보고자 만주를 다녀온 바 있다. 거기서는 일본 정탐꾼으로 오인돼 독립군 청년에 의해 얼굴에 총상을 입었다.

어찌 보면 극단적 내셔널리즘이 가한 폭력이었고, 절로 머리가 흔들리는 만해의 체머리 증상은 그런 테러의 후유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아우르는 포용의 리더십이 한용운의 것이었다.

실로 만해는 불자였지만 종교를 넘어 문화에 이르렀고, 강력한 지도자였지만 서툰 인간의 모습으로 대중 곁을 살았다. 그 사람 자체가 성과 속을 겸비한 큰 종인 셈이다.

『님의 침묵』 역시 그가 남긴 유일한 시집이자 민족의 유산으로 여전히 현전하고 있다. 이 또한 운명이리라. 우리에게는 시대의 진정한 어른, 지구촌 문화 전쟁을 이끌 리더, 정녕 그리운 선생의 대명사로 만해 한용운이 있다.

 

남기택 강원대 자유전공학부 국어국문학전공 교수

충남대에서 현대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강원문학연구회 회장, 계간 『문학의 오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제도 너머의 문학』(2020), 『강원권 시문학과 정전의 재구성』(2021), 『김수영에서 김수영으로』(공저, 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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