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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20] 토머스 페인, 식민지 미국인도 신뢰한 ‘영국 정체’를 비판하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20] 토머스 페인, 식민지 미국인도 신뢰한 ‘영국 정체’를 비판하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12.19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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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페인
토머스 페인. 사진=위키미디어
토머스 페인은 왕과 귀족의 정체를 끝내고 민주주의를 주장한 혁명가였다. 사진=위키미디어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1737~1809)의 『인권(The Rights of Man)』은 “오늘날의 세계를 이루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명저 10권” 중 하나로, 『성경』이나 『일리어스』나 『종의 기원』은 물론 『군주론』, 『자본론』, 『국부론』, 『국가론』, 『전쟁론』과 함께 꼽히는 명저임에도 한국에서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10권에 속하는 유일한 비서양 책인 『쿠란』보다도 『인권』은 무시된다. 심지어 일반인은 물론 정치학자도 페인을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친 페트릭 헨리(Patrick Henry, 1736~1799)와 혼동하기도 한다(가령 박의경, 『여성의 정치사상』, 218쪽) 

페인의 『인권』을 해설한 크리스토프 히친스는 페인을 체 게바라와 비교했다(『인권 이펙트』, 69쪽). 그러나 이러한 비교에는 문제가 있다. 20세기 ‘쿠바’의 혁명가인 체 게바라와 18세기 세계 ‘전체’였던 미국, 프랑스, 영국의 혁명가인 페인을 함께 본다는 것에는 어폐가 있기 때문이다. 페인은 세계 최초의 혁명가이자 세계의 혁명가, 국제 혁명가였다. 

게다가 페인은 수천 년, 아니 수만 년 지속된 왕과 귀족의 정체를 끝장내고 민주주의를 시작한 혁명가였다. 더 큰 차이는 체 게바라가 총으로 혁명을 한 반면, 페인은 펜으로 혁명을 했다는 점이다. 이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체 게바라가 최고 엘리트인 반면, 페인은 중졸 정도의 학력밖에 갖지 못한 노동자 출신이라는 점에서 더욱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그래서 인기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페인의 의지에 프랭클린이 답하다…“자유 있는 곳에 내 조국이 있다”

페인은 영국 출신이면서도 미국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어서 영국에서는 오랫동안 매국노로 불려 그의 고향에서조차 그를 기념하는 협회가 1963년에야 만들어지고 그 이듬해에 와서야 처음으로 동상이 세워졌다. 영국 동부의 토끼 꼬리에 해당하는 페인의 고향 노퍽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양손에 펜과 『인권』을 들고 있고, 동상 아래 받침대에 새겨진 지구본은 그가 세계시민임을 말해준다. 동상이 상징하는 자유, 인간의 진보, 모든 인류의 개선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보여준 페인은 세계를 조국으로 여기고 일생을 자기 절제로 살았다. 

조지 워싱턴과 벤저민 프랭클린을 비롯한 미국 건국의 공로자들도 처음에는 미국의 독립에 회의적이었다. 사진=위키미디어 

그는 돈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영국의 압제적인 억압으로 고통당하는 미국 식민지 개척자들의 대의를 위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제공하고 엄청나게 판매하게 했다. 그래서 미국에는 페인이 살았던 뉴욕주 뉴로셀에 1905년에 세워진 페인의 기념비와 기념관이 있다. 그러나 그뿐이다. 워싱턴을 비롯한 다른 건국공로자들에 비해 무시된다. 페인은 스스로 혁명이 한 나라의 특수한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국제적인 것이어야 함을 의식했다. 이는 그가 『상식』 서문에서 쓴 다음 문장으로도 알 수 있다. 

아메리카의 대의는 바로 전 인류의 대의이다. 한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닌 전 세계의 상황이 지금껏 수없이 일어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모든 인간의 원칙은 그 세계적인 상황의 영향을 받고, 그 결과로 그들에게 애정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어떤 나라를 총검으로 황폐하게 만들고, 전 인류의 자연권에 반대하는 전쟁을 선포하며 그 자연권의 옹호자를 지구상에서 말살하려는 행위는 자연으로부터 감정의 능력을 부여받은 모든 인간의 걱정거리다. 나 역시 당파적인 비난을 초월하여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중 하나다.(19쪽)   

『상식』은 영국의 왕이 지배함은 상식이 아니고, 미국의 독립과 민주주의의 수립이 상식이라고 최초로 주장하여 그것을 달성하게 한 책이다. 즉, 그전에는 독립해야 한다거나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 아니었다. 미국 독립의 아버지라는 워싱턴은 1770년대 초까지 독립에 반대했고 프랭클린도 마찬가지였으며, 심지어 페인 자신도 그러했다고 『상식』에서 말한다.

1775년 봄 메사추세츠 총독 토머스 게이지 장군은 영국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미국 내 반란군 손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무기를 모두 압수하라는 지시를 ㅂ 그 해 4월 18일 그는 군대를 보내 콩코드(뉴 햄프셔 주) 지역에 있는 미국군 무기고를 포획하고 렉싱턴에 숨어 있는 미국 군 지도자 사무엘 아담스와 존 한콕을 잡도록 했다. 사진=위키미디어

1775년 4월 19일, 영국과 싸운 최초의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 그들은 아메리카에 대한 영국의 부정을 시정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지 독립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독립은 재난과 죄악으로 가득 찬 것이고, 독립이란 자신들에 대한 중상모략이라고 비난했다. 그래서 페인이 『상식』에서 영국 정체 자체를 비판하자 독립전쟁에 참가한 많은 아메리카인들이 반발했다. 왜냐하면 대부분 영국 정체가 최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식』이 나온 지 6개월 만에 성립된 1776년의 <독립선언>은 페인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자유가 없는 곳에 내 조국이 있다”라는 페인의 명언은 “자유 있는 곳에 내 조국이 있다”는 프랭클린의 말에 대한 대답이었으나, 바로 그 말이 단순한 미국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세계의 자유주의자인 페인의 삶과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친 페트릭 헨리의 말도 페인의 이 말에서 비롯되었다. 

정부를 ‘필요악’으로 본 페인…아나키스트인가? 아닌가? 

페인은 영국과 프랑스의 압제에 대항하여 자유를 향한 투쟁에 계속 나섰다. 그 핵심은 1791년의 『인권』이었다. 따라서 페인은 단순한 독립운동가가 아니다. 그는 미국 출신도 아닌 영국 출신이므로 영국의 입장에서 보면 매국노였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그를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최초의 국제혁명가였다.

그는 세계를 고향으로 삼았다. 어떤 나라도 나쁜 나라는 그의 조국일 수 없었다. 그래서 페인은 영국의 정치학자 해럴드 래스키가 말했듯이 마르크스를 제외하면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논객”이었다. 그러나 굳이 마르크스와 비교한다면 페인은 마르크스보다 생명력이 더 길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이 페인의 사상이 갖는 아나키즘적 요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페인이 아나키스트인가?”라는 물음을 둘러싸고 논쟁이 있다. 페인을 기념하는 대표적 단체인 ‘토머스 페인 국민역사협회’(Thomas Paine National Historical Association, ‘내셔날’ 운운하지만 국립기관이 아니라 사설봉사단체이다)는 아니라고 한다. 그가 정부의 역할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행복과 복지를 증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고, 『농업의 정의』와 『인권』에서 그는 복지 국가의 기초가 될 원칙, 가난한 사람, 노인 및 젊은이를 위한 빈민구제, 노인연금, 실업구제를 주장했으며, 이를 위한 프로그램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부자세를 비롯한 소득세 징수를 지지하고 재산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토머스 페인의 『인권』은 자연권에 입각한 인권 관점에서 국가의 바람직한 모습과 역할을 제시했다. 사진=위키미디어

최근 논의되는 기본소득을 최초로 주장했다는 의견도 있다. 나아가 페인은 인권 원칙에 기초한 강력한 중앙 정부를 위해 싸웠고, 정부를 민주적으로 만들고 정부를 사용하여 사회적, 경제적 변화를 일으키려고 한 반면 아나키즘은 모든 정부를 무시하고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페인이 "기껏해야 정부는 필요악"이라는 문구 중 "악" 부분만 강조하여 아나키스트라고 하지만 "필요"라는 부분은 분명히 정부의 필요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장 프레포지가 『아나키즘의 역사』에서 그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는 것처럼 페인을 아나키스트로 보지 않는 아나키스트들도 많다. 그러나 위 협회의 전 회장이었던 울리엄 반 데르 에이드(William van der Weyde)를 비롯하여 페인을 아나키스트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필요악”이라고 하는 것은 최소한의 필요성을 인정한 것이고 이상적으로는 필요 없는 것으로 보고 철저히 불신했다는 것이다. 

조지 우드코크는 『아나키즘』에서 그를 아나키스트로 다루면서 페인의 정부 ‘불신’은 고드윈과 크로포트킨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페인은 크로포트킨은 물론 고드윈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고드윈이 1756년생이니 페인은 19년 연상이지만 서로 친구처럼 지냈다. 그러니 고드윈처럼 페인도 아나키즘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드윈보다 페인은 훨씬 실천적이고 행동적이었다. 그가 18세기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을 일으킨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페인은 1774년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 전반기 37년을 영국에서 가난하게 살았고, 그 뒤 13년간 미국에서 노예제 해방과 혁명을 위해 싸우고, 다시 1787년부터 1802년까지 15년을 프랑스에서 살며 프랑스혁명에 영향을 미쳤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와 7년 뒤에 비참하게 가난 속에서 죽은 점에서 바쿠닌보다 더 혁명적인 사람이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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