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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왜 힘을 잃고 자살에 이르렀는가
프랑스, 왜 힘을 잃고 자살에 이르렀는가
  • 이선우
  • 승인 2022.12.15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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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가 말하다_『프랑스의 자살』 에릭 제무르 지음 | 이선우 옮김 | 틈새책방 | 788쪽

우파 언론인 제무르, 분란 일으키며 대권 후보 올라
68세대 모순을 비판하며 프랑스 공동체의 붕괴 진단

프랑스 대선에서 온건 우파와 온건 좌파가 결선 투표에 올라가는 것이 당연해 보였던 시기는 끝난 지 오래다. 올해에도 극우를 대표하는 국민연합(RN)의 수장 마린 르펜이 결선 투표에서 마크롱과 대결하면서 2017년과 동일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하지만 이번 대선은 르펜이 독보적인 존재감을 점하고 있던 극우 진영에 에릭 제무르가 등장하며 상당히 흥미로운 구도가 펼쳐졌다.

제무르는 <르 피가로>를 비롯한 저널과 TV 시사 프로그램에서 꾸준히 활동해 오며 소위 ‘노필터’ 발언으로 종종 분란을 일으켰던 우파 언론인이다. 이슬람 이민자들을 향한 적나라한 욕설이나 LGBT에 대한 직설적 비난 등 그의 위험한 언사는 거침이 없다. 언뜻 비이성적 혐오주의자처럼 보이는 이 인물이 유력한 대권 후보로 떠올랐다는 사실은 프랑스라는 나라를 포장하고 있던 이미지와 매우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제무르는 몇 개의 단편적 기사와 자극적 이미지로 간단하게 폄하될 인물이 결코 아니다. 그는 1990년대 중반부터 프랑스를 걱정하는 에세이를 꾸준히 발표해 왔으며 그 바탕에는 언제나 굳건한 애국심과 민족주의가 깔려 있다. 그중에서도 2014년 발표된 『프랑스의 자살』은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반응을 일으키며 현재까지 50만 부가 넘게 팔린 제무르의 대표작이다.

이 책에서 보여 주는 프랑스의 현재에 대한 그의 진단과 정치적 비전은 매우 탄탄하고 논리적이며 설득력이 있다. 제무르에 대한 관심과 지지는 그만큼 프랑스의 현재를 엄중한 위기로 인식하고 우려하는 프랑스인들이 많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자살』은 1970년 드골의 장례식에서 시작하여 드골의 죽음을 아버지의 죽음, 민족의 죽음, 프랑스의 죽음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이후부터 현재까지 프랑스라는 국가가 점차적으로 힘을 잃고 ‘자살’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전방위적 분석을 시도한다. 저자는 오늘날 프랑스를 약하게 만든 범인으로 68혁명을 주도하고 그 이후의 사회를 이끌어 온 68세대를 지목하며, 그들의 모순과 딜레마를 조목조목 공격한다.

제무르는 68세대가 찬양해온 ‘PC(Political Correctness)적 사고’와 개인주의, 세계화 등의 가치 아래에서 프랑스 공동체가 무너졌다고 진단하며, 이와 관련해 무슬림 이민자 문제, 프랑스의 경제력 약화, 가족의 해체 등 현실적인 이슈들을 매우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결국 프랑스 프롤레타리아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고 결론 내린다. 좌파가 더 이상 자신들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 그들은 좌파를 지지할 이유를 잃게 되고 자연스럽게 우경화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프랑스 사회에 대한 제무르의 분석과 논리는 상당히 흥미롭고 타당하지만, 분명 한계도 갖고 있다. 철저한 민족주의에 바탕을 두고 독립적인 프랑스 재건을 꿈꾸는 만큼, 그의 논의는 영광을 누렸던 과거와 드골의 프랑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젠더나 가족 문제와 관련해서는 주관적이고 감정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아쉬움에 불구하고, 『프랑스의 자살』은 낭만화된 관점에서 벗어나 동시대 프랑스 사회를 현실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있는 텍스트이다.

나아가, 진정한 보수가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만들고, 진보는 무엇을 경계하고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던져 준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도 의미 있는 화두를 제시한다. 더하여, 프랑스가 거쳐 온 여러 사회적 이슈들은 오늘날 한국에서도 진행 중이거나 곧 일어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참고할 만한 이야기들도 많다. 

 

대권 후보로 떠오른 에릭 쥐스탱 레옹 제무르(프랑스어: Éric Justin Léon Zemmour, 1958년 8월 31일 ~ )는 프랑스의 극우 정치인, 언론인, 수필가, 작가, 시사평론가이다. 사진=위키백과

방대한 분량에 프랑스의 역사, 법, 경제, 문학, 대중문화, 심지어 스포츠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아우르고 있다 보니, 독자들을 고려하여 최대한 쉽게 풀어내고 가독성을 높이는 데 무게를 두었다. 그 과정에서 제무르 특유의 난해한 표현과 현란한 만연체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다는 점은 여전히 아쉽게 느껴진다. 한편, 정치적 색채가 묻어나는 텍스트라는 사실은 여전히 조심스럽고 걱정스러운 마음을 버리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적어도 학계의 선후배와 동료들은 번역의 의의를 이해해 주리라는 믿음으로 이 책을 권하고자 한다.

 

 

 

이선우
성신여대 프랑스어문·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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