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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한다면 잘못을 고쳐보라
후회한다면 잘못을 고쳐보라
  • 박현모
  • 승인 2022.12.11 00: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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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이불개를 추천하며_ 박현모 여주대 교수·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
박현모 여주대 교수·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

올해의 사자성어로 ‘과이불개(過而不改)’, 즉 잘못을 저질러놓고 그 잘못을 고치지 않는 그것이 진짜 잘못(過而不改 是謂過矣)이라는 공자의 말을 추천한 이유는 두 가지다. 그 하나는 우리나라 지도층 인사들의 정형화된 언행을 이 말이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당이나 야당할 것 없이 잘못이 드러나면 ‘이전 정부는 더 잘못했다’ 혹은 ‘야당 탄압’이라고 말하고 도무지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과이불개’를 추천한 더 큰 이유는 잘못을 고친 사례가 우리 역사 속에 있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니 잘못(過)을 고쳐서(改) 좋은(善) 쪽으로 옮겨간(遷) 사례가 여럿 있었다. 성군(聖君)으로 알려진 세종 역시 잘못한 일이 많았다. 세종이 잘못해서 후회한다고 말한 기록만도 『세종실록』에 10여 차례 이상 나온다. 

사람을 잘못 임명해 외교망신을 당했을 때, 세종은 “사람을 잘못 알고 보낸 것을 심히 후회한다”라고 말했다. 나랏일에 몰두하느라 자신과 신하들의 건강을 돌보지 않은 것도 ‘뉘우친다’고 했다. 세종이 가장 많이 ‘후회 된다[至今悔之]’ 혹은 ‘깊이 뉘우친다[予深悔之]’라고 말하는 사례는 잘못 판단하여 백성 생명을 다치게 했을 경우다. 미리 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아서 역질(疫疾)로 함경도 백성들이 많이 죽은 일에 대해서 ‘크게 후회한다’고 했다. 

인상적인 대목은 후회를 넘어서서 잘못을 고치는 장면이다. 재위 11년인 1429년 8월 8일에 세종은 “그때 저지하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라고 말했다. 외국 사신 숙소인 태평관을 고쳐지으려 할 때 최윤덕 장군이 “사정전과 경회루 공사가 이미 진행 중인데 태평관까지 시작하면, 백성들이 너무 힘들 것”이라고 반대했었다. 하지만 세종은 국가의 인증 없이 살아가는 승려들에게 부역을 시키고, 도첩(圖帖: 인가증)을 발급해 준다면 태평관 공사도 이뤄지고, 백성들도 괴롭히지 않게 되어, 두 가지 일이 다 잘 되지 않겠느냐며 강행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공사는 “한 치의 공효(功效)도 없이 많은 승려들이 죽고 다치는” 것으로 끝났다. 

이 시행착오와 반성 때문이었을까? 한 달 뒤에 발생한 군자감(軍資監: 군량미와 군수품 담당 관청) 건물 붕괴사건 때 세종의 대처는 달랐다. 그해 9월 15일 지금의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군자감 건물이 수리 중 갑자기 무너져서 5명이 압사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세종은 “압사당한 사람들이 매우 가엾다”면서 모든 정치 일정을 멈추게 했다. 이어서 공사 현장의 감독관은 물론, 공사 설계자들과 국가 공사의 최고책임자인 공조판서(국토부장관)까지 구금했다. 여기에 더해 군자감을 처음 지을 때의 책임자까지 체포하여 수사하게 했다. 즉시 의사를 보내 치료케하고, 사고를 당한 사람들의 고향집에 관리를 보내 위로하고 보호하게 했다.

참사 발생 이틀 뒤인 9월 17일 세종은 의금부 책임자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울어져서 위험한 건물을 바로잡으려면, 마땅히 기계(器械)를 모두 준비하고, 삼가고 조심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후환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 군자감 관리들은 기계를 갖추지 않았으니 그 죄의 첫째이며, 그 집이 기울어져 전복되게 한 일이 그 죄의 둘째이다. 많은 사람들을 압사하게 한 점이 그 죄의 셋째이며, 즉시 구료(救療)하여 살리지 아니했으니 그 죄의 넷째이며, 구료하지 아니하고 다투어 돌아온 것이 그 죄의 다섯째이다.”

이 실록기사를 분석한 박형 교장(수원 이의중)에 따르면, 세종이 말한 첫째에서 셋째까지는 ‘과실(過失)에 의한 치사(致死)’이고, 넷째와 다섯째는 ‘부작위(不作爲)에 의한 살인’에 해당한다. 사람이 다쳤으면 마땅히 놀라서 구료하기에 겨를이 없었어야 할 것인데, 다만 처벌받을 일만 생각하고 모르는 체하고 들어와 버렸다는 세종의 지적이 ‘부작위(不作爲)에 의한 살인’의 근거이다. 세종은 “살아날 수 있는 사람까지도 죽게 만든 그들을 국문하라”고 지시하고, 완악(頑惡)한 그들을 엄히 처벌하라고 명했다. 이때 보인 세종의 일벌백계라는 ‘한 번의 진노’ 때문이었을까? 놀랍게도 이후 안전사고에 의한 대규모 인명피해는 세종 재위 기간 내내 발생하지 않았다. 잘못을 고치거나 처벌받기는커녕 인정하지도 않는 지금 우리는 어떻게 진노해야 하는가? 

박현모
여주대 교수·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

서울대에서 「정조(正祖)의 정치사상」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1년부터 14년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정조와 세종, 정도전과 최명길 등 왕과 재상의 리더십을 연구했다. 저서로 『태종평전』, 『정조평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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