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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살아가는 삶이 그립다
상식으로 살아가는 삶이 그립다
  • 최재목
  • 승인 2022.12.12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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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_ 최재목 논설위원 / 영남대 철학과 교수

 

최재목 영남대 교수

내우외환으로 숨 가빴던 한 해였다. 바깥으로는 급변하는 세계질서에 온통 삐걱댔고, 안으로는 레짐 체인지 뒤 새 정부의 틀 짜기가 위태로웠다. 세계의 풍광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예전의 모더니즘으로 후진한 느낌이고, 우리 사회는 흑백의 근대, 우울한 과거의 이념에 심지를 박고 여전히 불타고 있는 듯하다. 

누가 불을 지펴대는가. 남북분단 체제를 사유의 근본에 두고, 민주·민족·민중 개념을 둘러싼 투쟁·실천에 여념 없던 586 운동권 세대이다. 이들은 여전히 대한민국 탄생 역사의 불온성,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억압, 근대산업화에 따른 민중 수탈을 조명하며 살아오고 있다.

그래서 보수와 진보를 가르고, 현재를 살아가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진리성, 도덕성을 묻는 기준과 원칙을 제공해왔다. 누가 옳은 사람이며, 어떤 학술이 좋은가를 단정하고, 가르치며, 심지어 단죄까지 하고자 한다. 이에 대항하는 보수는 현 국가체제가 누리는 풍요와 평화, 성장과 발전을 정당하게 인정, 평가받고자 한다. 왈가왈부, 일심(一心)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뜨겁게 화쟁(和諍)하는 대한민국은 세계사 속에서 하나의 방법이거나 과제처럼 보인다. 

어느 쪽도 전부 틀렸거나 또 전부 맞다고는 하지 않겠다. 다만 적어도 ‘이치가 사람을 죽여서는(以理殺人)’ 안 된다는 원칙은 있어야 하겠다. ‘이치’란 ‘이념, 주의, 주장, 명분’ 같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든 도구들이다. 이런 것들을 앞세워 사람과 삶을 규제, 징벌하는 그런 시대를 벗어나자는 말이다. 그 어떤 것이 사람과 삶을 우선하겠는가.

그토록 옳다던 생각과 주장도 세대가 바뀌고 세월이 지나면 구닥다리가 되지 않았던가. 시효가 끝났으면 생각도 주장도 자리를 떠야 한다. 희귀동물처럼, 골동품처럼,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전시물이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한 해의 마지막에 서서, 그냥 상식으로 살아가는 삶을 그리워하게 된다. 누구나 만나, 정치 이야기는 빼고, 그냥 평범한 일상사를 주고받는 날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마디로 상식과 공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립고, 그들에게 기대를 걸고 싶어진다. 대립하는 이념을 벗어난 중립적 입장, 즉 중도에서 사유, 행동하는 사람들 말이다.

이런 사람들을 기회주의자라 해서는 안 된다. 각자의 상식과 양식으로, 무언가를 향해 합리적으로 공정하게 사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정치와 특정 이념에 관심 가지기보다는 누군가를 더 사랑하고, 더 많이 걷고 여행하며, 보람 있는 시간을 찾는 이런 사람들이 증가했으면 한다. 

사실 요즘 학생들, 젊은이들이 그런 것 같다. 각자도생에 더 관심 있는 MZ세대도 그렇다. 이념보다도 자신을 사랑할 줄 알고,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몰상식과 불공정을 위해 열심히 싸울 줄 안다. 삶을 억압하는 체제나 권력에 반항할 줄도 안다.

이들은 떼 지어 몰려다니는 이념형 세대를 어떻게 쳐다볼까. 철 지난 바닷가에서 혼자 뜨겁게 불타다가 쓸쓸히 저물어 갔으면 할까. 저 먼 곳으로부터 빙하에 의해 운반되었으나 그 소실로 주저앉은 표석(漂石)처럼 생각할까. 시효가 끝난 흑백의 근대, 우울한 과거의 이념 속에 살며 “라떼는 말이야”라 해도 안 통하는 시대라 좋다. 

현재 젊은 세대는 많은 과제에 직면해 있다. 기후 위기, 인구절벽, 고령화, 농촌-지방-지역대의 소멸, 다문화 세대의 증가, 첨단 기술과의 경쟁 등등 글로벌 상상력과 지성, 협업이 절실한 사안들이다. ‘대지-지구의 학문과 철학’을 구상하며, 새롭게 행동해 가야 한다. 586 이념형 세대는 입은 닫고, 지갑을 열며, 자리를 내줘야 할 때다.

최재목 논설위원
영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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