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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했던’ 우리가 어떻게 ‘대화하지 않는’ 우리가 되었는가
‘대화했던’ 우리가 어떻게 ‘대화하지 않는’ 우리가 되었는가
  • 이시윤
  • 승인 2022.12.07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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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32 한국 인문사회과학, 대화가 사라진 이유_ 이시윤 강사

<교수신문>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연재를 시작하며: 새 세대 한국 인문사회 연구자를 만난다

 

90년대 하버마스 인기의 부침이 
한국 인문사회과학 학술장이 대화하지 않는 
지금의 모습으로 변화의 방향이 잡혀 나가는
‘구조변동’을 겪는 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30년이나 지나버린 일들을 제대로 평가하고 
그 교훈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새로 만들어 나가는 데 유용한 재료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인문사회과학의 위기론을 마주하는 것도 이제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시절이 되었다. 지난 20여 년 간 위기론은 여러 번, 여러 다른 이름을 가지고 우리 곁을 찾아왔다. 그러나 이 걱정 어린 말들은 몇 차례 솟아오르는 봉우리를 이루며 출렁이기만 할 뿐, 사태를 개선하는 동력이 되지 못하고 소모적으로 반복되었을 뿐이다. 

위기의 본질에 대한 많은 진단들이 있었지만 그 중심부에는 늘 한국 인문사회과학이 가진 지식의 식민성, 다른 이름으로 독자적-자생적 이론 정립의 실패 문제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 우리가 그동안 남의 것을 가져다 쓰는데 급급했다는 것, 그것이 유행처럼 대상을 바꾸어 반복되어 왔다는 것, 우리의 것이 없다는 것, 우리가 이미 가진 지적 자원들을 발굴해서 그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요청들이 그것이다. 

위기를 키우는 위기 담론

그러나 이러한 질타가 이뤄지기 이전에 우선 직시해야 할, 보다 근본적으로 절망스러운 사실은 우리에게 사실 제대로 된 담론과 논쟁이 없다는 것이다. 이따금 산발적으로 저널의 한 두 꼭지, 혹은 신문지면 상에서 이른바 ‘논쟁’이 등장하고 이내 금세 잊혀질 뿐, 그것이 새로운 통찰력과 건설적 모델의 제안으로 발전되는 경우를 좀처럼 발견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우리의 학문을, 학파를, 사상을 기대할 수 있을까? 

우리가 남의 글을 읽지 않는다고 누구나 한탄한다. 하지만 그 비판의 글에도 남의 글이 없다는 사실은 몇 번을 접해도 놀랍다. 그도 그럴 것이, 일껏 남의 글을 읽고 비판해도 다시 여기에 대해 비판 대상의 응답이 없거나, 한 두 번 말이 오고 가다가 인신공격으로 끝나거나, 그 논쟁에 다른 사람이 개입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소모적인 위기담론들의 등장 그 자체가 사태 악화에 수행적으로(performatively) 기여한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문제제기는 난무하지만 그것들조차도 서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것만큼 사태의 본질을 보여주는 일은 없다.

이러한 악순환의 반복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특유의 냄비근성, ‘유교적’ 상하관계, 맹목적 서구 추종 문화, 미국에 식민화된 인적·제도적 문제, 대학의 기업화, 사회의 보수화와 신자유주의화…. 대체 그 어디에 대화하지 않음의 원인이 숨어있는 것일까?  

인문사회과학의 시대가 절정에 달해 이내 쇠퇴하기 시작하는 과정의 한 가운데에서 그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하버마스 수용이었다고 필자는 말한다. 사진=위키미디어

열정의 시대가 어떻게 시작됐고 사그러들었는가

그러나 시간을 아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우리에게는 뜨거운 대화의 시대가 있었다. 인문사회과학 서적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대학이 토론의 장이 되고, 세상 사람들의 눈이 그곳에 쏠리던 때가 짧으나마 분명히 있었다. 1980~1990년대, 이른바 ‘(인문)사회과학의 시대’가 그때이다. 이 시기에 주목할수록, 문제적 상황을 바라보는 질문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그러한 우리가 왜 그리고 어떻게 그렇지 않은 우리가 ‘되었는가?’가 질문되어야 한다. 위기진단 담론들에서 중구난방 제기된 원인 분석들은 통시적 접근을 통해 하나 하나 꼼꼼하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

최근 나의 박사학위논문이 『하버마스 스캔들』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여기에서 나는 지식사회학적 관점에서 잊혀져 가고 있는(신진 연구자 세대 중 대부분은 이제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그 열정의 시대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사그러들게 되었는지를 구체적이고 분명한 대상을 택하여 가능한 명료하고 일관성 있게 설명해 내려 했다.

1990년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위르겐 하버마스 ‘열풍’이 그 대상이고, 피에르 부르디외의 학술장의 진화와 관련된 이론틀이 그 방법이었다. 나는 인문사회과학의 시대가 절정에 달해 이내 쇠퇴하기 시작하는 과정의 한 가운데에서 그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하버마스 수용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하버마스 인기의 고조와 쇠퇴 과정에서 읽어낼 수 있는 긍정적 가능성과 부정적 모습을 포괄하고 양 측면이 배합된 비중의 변화 양상을 설명하기. 하버마스를 소화하기 위해 애썼던 학자들의 글을 꼼꼼하게 찾아서 읽고 옥석을 가려내기.

한 학자와 다른 학자의 사이, 하나의 그룹과 다른 그룹의 사이, 글과 글 사이가 서로 어떠한 모습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그것들이 당시 우리 학술장의 모습을 어떠한 ‘구조’로서 모양 짓고 있었는지를 드러내기. 그렇게 분명한 대상(인물, 글)을 지칭하여 단일한 방법으로 가장 명확하게 설명함으로써 발생하는 선명한 위험부담을 그대로 짊어지기. 구체성과 명료성이 높아질수록 그것이 비로소 무엇인가를 ‘함께’ 말할 수 있는 분명한 토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90년대 하버마스 수용의 교훈

책에서 나는 한 마디로 90년대 하버마스 수용이 단순한 이론 수용을 넘어서 국내 인문사회과학 장이 진일보하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 즉 밀도 높은 상호작용의 이론집단의 형성 가능성을 창출해 냈지만 그것이 당시 강화되고 있었던 국내 학술장의 두 ‘아비투스’인 딜레탕티즘(연구의 범위를 넓고 얕게 옆으로 넓혀가는 성향)과 학술적 도구주의(학술실천을 사회의 변화 개조라는 목적의 도구로 삼으려는 성향) 사이에서 분해되고 말았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그 공과의 대부분이 내가 ‘신진 하버마스 연구그룹’이라 칭한, (현 <사회와철학연구회> 중심의) 변혁지향적 신진 사회철학자들에게 있다고 보았다. 왜 더 파고들고 서로 대화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내가 비판이론에 관심을 가지고 배우고 연구하며 읽어온 그 선배 학자들에게, 다름 아닌 후배 독자였기에 할 수 있는 비판이자 그 자체가 대화의 시도였고 또한 그것이 바로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였다. 

나는 90년대 하버마스 인기의 부침이 한국 인문사회과학 학술장이 대화하지 않는 지금의 모습으로 변화의 방향이 잡혀 나가는 ‘구조변동’을 겪는 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현상이 지금의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 그때의 우리를 이해하는 출입구가 되어, 이제는 30년이나 지나버린 일들을 제대로 평가하고 그 교훈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새로 만들어 나가는 데 유용한 재료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앞으로 나는 이 작업을 시간상 더 뒤로 끌어 오고, 또한 하버마스 현상을 다른 이론 수용 양상들과 비교하면서 보다 큰 그림을 그려보려 한다. 당시 독일 비판이론과 가장 강력하게 경합했던 이른바 프랑스 ‘포스트모던’ 이론들이 주요 대상이다. 이 기획은 불가피하게 사안과 연결된 많은 사람들과의 긴장 어린 대화를 촉발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대화의 조짐은 사실 내가 아니더라도 이미 학문장의 안팎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는 것 같다. 우리 학술장의 모습을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려내려는 시도들이 점점 더 많이 보인다. 나는 그저 그 거부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 한 명의 참여자로서 충실히 대화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대화에 참여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의 그림을 함께 그려가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선 자리를 규명하는 것, 위기 극복의 첫걸음

학문후속세대 재생산 위기에 대해 진행되어 온 많은 비판적 논의들은 신진 학자들의 연구환경과 직업 안정성 문제에 주로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 듯 보인다. 이 문제는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지만, 실제로 연구 활동이 이뤄지는 ‘상징세계’에서의 문제를 조명하는 일 또한 못지않게 중요하다.

바로 우리 인문사회과학은 장의 신규 진입(후보)자로 하여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에서 출발해서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극도로 불투명한 상태에서 학문을 시작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학술 활동의 준거점은 다시금 서구를 향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제도적 차원에 더한 학술적 ‘시계제로’의 환경에서 국내 학술장에서 수련하려는 신진 세대의 유입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학술장의 구조와 역사를 드러내어 우리가 선 자리를 규명하려는 대화 그 자체가 위기를 극복하는 중요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시윤 공주대·청주대·성균관대 강사
동국대에서 선학을 전공했고 서강대에서 사회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공주대, 청주대, 성균관대에서 강의하며 사회이론, 지식사회학, 종교사회학을 연구하고 있다. 서구이론 수용 현상에 대한 후속연구를 비롯하여 비판이론과 종교, 생태주의가 만나는 지점에서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담론을 분석하는 연구 기획들을 진행 중이다. 최근 박사학위 논문을 단행본 『하버마스 스캔들: 화려한 실패의 지식사회학』으로 출간했고, 「1990년대 학술장의 구조변동 속에서 한 하버마스주의 철학자의 궤적: 장춘익의 지적 여정의 의의와 한계」, 「’두 개의 운동’으로서의 천성산 터널 반대운동: 종교시민운동 축의 복원과 시민환경운동과의 관계 분석」, 「한국 종교지형에 대한 이론 분석과 통합 과제(오세일 공저)」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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