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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풍경 : 시평론집으로 풍성해진 독서계
책들의풍경 : 시평론집으로 풍성해진 독서계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6.05.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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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란 무엇인가 … 깊이읽기의 묘미

시평론집 간행이 늦봄 서점가와 뜨겁게 내통하고 있다. 그 많은 신문지면이 버터 냄새 나는 서구식 문학에 바쳐지는 요즘, 아무도 살펴봐주지 않는 이 문학의 변방들이 묘하게 감성을 자극하며 눈길을 끈다. 최동호 고려대 교수의 ‘진흙 천국의 詩적 주술’(문학동네), 이숭원 서울여대 교수의 ‘감성의 파문’(문학수첩), 구모룡 한국해양대 교수의 ‘시의 옹호’(천년의시작)가 모두 시를 전문으로 다루고 있다. 고종석의 ‘모국어의 속살’(마음산책)은 저자의 시집서가에서 추려낸 50명 시인에 대한 비평적 말걸기를 시도하고 있다. 풍성한 시에 비해 소설 평론집은 작년에서 출간이 멈춰져 있다. 소설의 부재가 시의 존재를 부각시키니 느낌이 야릇하다.


이숭원 교수는 학교 행정일로 백수건달이 되어간다는 허탈감을 떨치려 그동안 썼던 글과 그 글이 대상으로 한 작품을 꼼꼼히 다시 읽었다. 그런 다음 버릴 건 버리고 ‘감성의 파문’을 펴냈다. 넉넉하고 인자한 이 교수의 실제 모습은 그의 글에서도 잘 드러난다. “시는 그냥 아름답고 재미있는 글 아닌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 깊은 울림을 주는 사연을 들려주되 너저분하게 늘어놓으면 재미가 없으니까 잔가지를 치고 정수만 간명하게 일러주는 것 아닌가”라는 물음에서 시를 대하는 호방한 태도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시를 읽는 방식은 시인과 감성의 코드를 맞춰 들어가는 형식이다.


때론 넓은 가슴으로 두루뭉술하게 만나기도 하지만, 미당 서정주를 소재로 삼은 이시영의 시나, 소녀 가장을 다룬 이진명의 시와 접속하는 그의 감수성은 넉넉한 풍채와는 다르게 아주 뾰족하다. 특히 생태시를 생명시, 환경시 등과 구분하고 “봄산을 차꼬 차고 끌려나온 봉두난발”로 묘사한 홍신선 시인의 시에서 그 구체적 형상을 찾는 모습은 시평론의 필요성까지 느끼게 한다.


‘감성의 파문’이 감동적 시들과 교유하고 있다면, ‘시의 옹호’는 옥석을 가리는 판관의 악역을 자임하고 있다. 구모룡 교수는 이미 2000년에 발표해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서정주 미학 비판’에서 ‘시적 기만의 정신구조’를 읽어내고 있다. 그에게는 미당이 무책임의 윤리를 미끈한 언어로 은폐ㆍ분식시킨 ‘언어의 도금술사’이며 사상성의 부재를 온몸으로 체현하는 존재로 다가온다. 그에 비해 이숭원 교수는 이런 ‘무책임의 윤리’에 대해 용인하는 편이다. “사람이 어떤 정황에 휘말리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것 아니겠냐는 생각, 설사 내가 그 말을 했기로서니 그것이 또 무슨 대단한 일이겠느냐는 생각으로 미당은 평생을 살아갔을 것”이라고 말한다. 미당은 언젠가 ‘方下拓’이라는 독특한 수련법으로 건강을 유지한다고 자랑한 적이 있는데, 萬念이 육신 밖으로 툭 끊어져 땅에 머리만 대면 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맘 편하게 살다 훌쩍 떠난 老시인의 좀더 내밀한 生理와 만나야 하는 건 아닐까.


한편, 최동호 교수는 “서구의 비평이론을 원용한 혁신적인 명제보다 내적 논리를 심도 있게 되새겨보는 것”으로서 평론의 길을 삼아온 내공을 몰아 이번 책에선 작심한 듯 시의 존재감을 전면에 내세운다. “시의 미래가 있을까. 그렇다. 시의 미래가 없다면 인류의 미래도 없다”는 서문에서 중진 평론가의 문학적 신념이 둔중하게 느껴지지만, 최 교수의 평론집은 앞서의 이숭원 교수보다는 교술적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그가 강조하는 동아시아의 자연시의 전통, 종교적·생태적 상상력의 문명사적 의미를 포착해내는 모습은 중견시인들의 난숙한 시세계와 호응하면서 물결을 만들어낸다.


최근 일본의 저명한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했는데, 이들 평론집은 작품을 음미하는 일이 여전히 황홀경의 마성임을 느끼게 해준다. 아니, 문학에 겨눠진 화살을 오히려 독자에게로 돌려놓는다고 할까. 문학을 근대적으로 받아들이고 규정하는 읽기의 방식이 지리멸렬해진 것이지 문학이 인류와 함께 장기지속해온 그 에센스가 소멸된 건 아닐 것이다. 고종석이 ‘모국어의 속살’에서 한 말을 빌리면 우리 주위엔 “예스러우면서도 새롭고, 깊다라면서도 높다랗고, 순정하면서도 풍만한” 미발견된 시적 문맥이 아직 많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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