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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49] 쿨병의 정체
[한민의 문화등반 49] 쿨병의 정체
  • 한민
  • 승인 2022.11.28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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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49

 

한민 문화심리학자

쿨하다는 차갑다, 시원하다라는 영어단어 cool에 하다가 붙은 말로, 어느덧 국어사전에까지 올라가 있는 말이다. 꾸물거리거나 답답하지 않고 거슬리는 것 없이 시원하다라는 뜻이다. 시원하다는 뜻이 cool과 연결되어 나타난 표현으로 보인다. 쿨하다는 표현은 정확하게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1990년대 들어 등장한 것으로 추측된다.

90년대는 소위 X세대라는 신인류가 등장한 시기인데 관습이나 예절 등 옛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할 말 다 하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이들을 수식하기 위해 나타난 표현이 아닌가 싶다.

쿨병이란 쿨함이 지나쳐 병이 됐다는 뜻인데 적당하면 좋을 쿨함이 뭔가 정상 범주를 넘어섰다는 얘기다. 쿨함이 멋지고 바람직한 행위양식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이를 좀 과하게 내면화한 이들도 나타났을 것이고 이들 중 자신과 주변인들의 적응과 심리적 안녕을 저해하는 경우가 쿨병으로 범주화 되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물론 정신병리를 분류하기 위한 진단분류체계(DSM)에는 없는 진단명이지만 쿨병이란 병명은 이미 인구에 회자된 지 오래, 즉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맥락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쿨병을 학술적으로 살펴볼 이유가 충분하다. 또한 연구하시는 분들은 바빠서 이런 문제에 신경 쓸 여력이 없으시니 필자와 같이 비교적 한가한 사람이 맡는 게 옳다.

자신이 쿨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세상 일에 대해 다 안다는 태도를 취한다. 잘잘못을 따지고 대책을 마련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똑같다’든가, ‘어차피 그렇게 가게 돼 있어’ 등의 말로 더 이상의 관심을 끊는다.

심지어 자신의 부적절한 처신이 드러났음에도 자신은 전혀 그 일과 관계없다는 듯이 말하는 소위 ‘유체 이탈 화법’을 사용하거나 궁지에 몰렸을 때 아무렇지 않은 척하거나 논점을 돌리고 딴청을 피우기도 한다. 

이러한 쿨병의 증상은, 공감능력의 결여와 사고력의 부족으로 요약할 수 있다. 타인의 처지와 감정에 공감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가장 ‘있어 보이는’ 감정인 쿨함을 내세우는 것이고, 사안에 대해 깊이 사고할 능력이 부족하거나 그럴 의지가 없기에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다. 

쿨병의 원인은 공감능력과 사고력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상대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동기에 있다. 때문에 이들은 자신의 우월성에 위협을 받으면 상대방을 깎아내리거나 어떻게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자신의 견해가 무조건적인 진리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저급한 부류로 취급한다. 쿨함이란 그러한 동기를 가리기 위해 겉으로 드러내는 태도에 불과하다.

자신은 이렇게나 냉철하고 합리적인데 상대방은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으로 대응한다는 식이다. 쿨병 환자들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문제에 대해 ‘별 걸 다 가지고 난리다’, ‘피곤하게도 산다, 그냥 좀 넘어가라’, ‘왜 OO가 욕먹는 거냐, 선비들 나셨다’ 등의 반응을 보이며 불만을 제기한 사람을 편협한 꼰대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이런 이슈들 중에는 사회정의나 보편적 원리에 반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시민이라면 조금 피곤하고 성가셔도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그들은 왕조시대의 신민이 아니요, 누군가가 불어제끼는 피리소리에 강물로 뛰어드는 레밍도, 밥만 주면 누구에게나 꼬리를 흔드는 개돼지도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쿨하다면서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판에는 전혀 쿨하지 못한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세상 만사에 초탈한 듯 표표히 강호를 떠도는, 그러나 머릿속에는 천하를 거머쥘 계책이 있으며 칼 한 자루로 태산이라도 벨 듯한 무공을 지닌 은둔 고수로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것 같지만, 임상적 관점에서는 실생활에서 그 어떤 계책도 실행해보지 못하고 태산은커녕 김치 쪼가리 하나 잘라 보지 않은 방구석 찐따에 지나지 않는다.

은둔 고수의 쿨함이 다년간의 수련과 헤아릴 수 없는 실전 경험,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수양과 세상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나온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쿨함은 치료를 받아야 할 정신병리의 범주로 남을 수밖에 없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문화라는 산을 오르는 등반가. 문화와 마음에 관한 모든 주제를 읽고 쓴다. 고려대에서 사회및문화심리학 박사를 했다. 우송대 교양교육원 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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